제작비 130억 원, 전작 860만 관객의 바통을 이어받은 영화 . 오프닝에서 갤리온선을 몰고 등장하는 파마머리 해랑을 보자마자 저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 영화가 고증보다 판타지를 선택했다는 걸 첫 장면에서 대놓고 선언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습니다.해적 도깨비 깃발 개연성: 이 배는 처음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여말선초(麗末鮮初), 그러니까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설정인데, 해랑(한효주)이 타고 다니는 갤리온선(Galleon)이 등장합니다. 갤리온선이란 15~17세기 유럽에서 활약한 대형 범선으로, 콜럼버스가 1492년 바하마에 도착할 때 탔던 선박보다도 한 세대 뒤에 나온 배입니다. 영화 배경이 15세기 초임을 감안하면 시대가 100년 가까이 어긋..
극장에서 두 번 졸고, 한 번은 옆자리 팝콘 소리에 깼습니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을 보고 나오면서 제가 마음속으로 한 일은 마법사의 세계 해지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리포터 세계관의 프리퀄이라면 팬들의 향수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먹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극장에서 확인해 보니, 향수가 서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역으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 각본이 무너지면 설정도 무너진다저는 해리포터 직격 세대는 아닙니다. 뒤늦게 소설과 영화를 접했는데도 어린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으로 신비한 동물 사전 1편을 봤고, 에디 레드메인의 매력과 옵스큐러스라는 설정 덕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은 개봉 직후 글로벌 TOP 10에 진입하며 한국 액션 장르물의 새 기준점을 세웠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감상문 대신 인사평가서를 꺼냈습니다. 킬러의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회사 이야기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길복순 업무역량: 수성펜 한 자루로 만점을 받은 이유오프닝에서 길복순이 수성펜 하나로 목검을 든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저는 속으로 인사평가서의 업무 역량 칸에 만점을 찍었습니다. 아무 무기도 없이 주변 사물을 즉각적으로 전술 도구로 전환하는 이 능력, 액션 장르 용어로는 임기응변 전술 적용(improvisational tactical response)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임기응변 전술 적용이란 사전에 계획된 무기 없이 현장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티빙 오리지널 '이재, 곧 죽습니다'를 틀었을 때, 저는 그냥 가볍게 한두 회 보다 끄려 했습니다. 그런데 3라운드 왕따 고딩 편에서 화면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죽음을 소재로 하면서도 철저하게 삶의 편에 서 있는 작품입니다. 게임 구조로 설계된 서사를 공략일지처럼 뜯어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진짜 메시지가 보입니다.이재 곧 죽습니다 게임 구조: 이 드라마가 설계된 방식제가 직접 정주행해보니, 이 드라마의 서사 구조는 '옴니버스 환승 포맷(Omnibus Transfer Format)'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옴니버스 환승 포맷이란, 매 회차마다 독립된 인물의 삶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주인공 한 명의 성장이 관통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각 에..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오펜하이머를 '원자폭탄을 만든 영웅 과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나오면서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위대함이 아니라 오만함이었습니다. 액션도 CG도 없이 대사와 서사만으로 3시간을 꽉 채운 영화가, 보고 나서 검색 기록까지 바꿔놓을 줄은 몰랐습니다.영화 오펜하이머의 구조 — 임계질량과 프로메테우스영화를 보고 온 날 밤 첫 번째 검색어가 "임계질량"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어렴풋이 따라가긴 했는데 개념이 선명하게 정리가 안 됐거든요. 임계질량(Critical Mass)이란 핵분열 연쇄반응이 스스로 지속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 질량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일정 무게 이상 모으면 외부 점화 없이도 폭발이 일어나는 지점인데, 영화 ..
페미니즘 영화를 싫어해야 바비를 비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중반까지 꽤 즐겁게 봤습니다. 극장을 나서면서 친구는 "유쾌하고 예쁜 영화"라고 했고, 저는 "중반까지는"이라고 답했습니다. 그 한 마디 차이가 집에 오는 내내 논쟁이 됐습니다. 바비는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다만 그 가치가 온전히 발휘됐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바비 인형의 역사와 영화가 출발한 맥락1959년 처음 등장한 바비 인형은 당시 시장에 아기 체형 인형밖에 없던 상황에서 성인 여성의 몸매와 다양한 직업군을 내세운 파격적인 상품이었습니다. 이후 바비는 여성에게 꿈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잘못된 미적 기준을 심어준다는 비판도 받아왔습니다. 마치 여성 해방의 상징이었던 미니스커트가 오늘날에는 성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