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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리뷰 (용남, 클라이밍, 재난영화)

Stv 2026. 9. 11. 09:39

목차


    제게도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놀림받던 특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릴 적 보이스카우트에서 배운 매듭법. 인생에서 그게 빛난 순간은 이삿날 트럭 짐을 묶을 때 단 한 번이었지만, 그 한 번의 뿌듯함을 아직 기억합니다. 엑시트는 그 뿌듯함을 도시 전체 스케일로 키운 영화입니다. 조정석과 임윤아가 유독가스에 잠긴 도심을 맨몸으로 탈출하는 재난 코미디이고,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



    엑시트 영화 리뷰: 쓸모없던 특기의 반격

    남들 다 출근하는 시간에 공원 철봉에 매달려 있는 남자, 용남(조정석). 대학 시절 클라이밍 동아리의 에이스였지만 그 경력은 이력서 어느 칸에도 못 들어가고, 취업은 번번이 낙방, 동네 꼬마들에게는 유명인사요 조카에게는 한심한 삼촌입니다. 철봉에 매달리는 이유도 짠합니다. 몸이 기억하는 유일한 잘하는 것이니까요(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그런 용남네의 큰 행사가 열립니다. 어머니 칠순잔치. 집에서 꽤 떨어진 연회장 구름정원을 용남이 굳이 고집한 이유가 잔치 자리에서 밝혀지는데, 그곳 부점장이 대학 동아리 후배이자 오랜 짝사랑 의주(임윤아)였던 겁니다. 반가움도 잠시, 취업 준비 중이냐는 안부에 서슴없이 나오는 거짓말과 '편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자'던 과거의 기억까지 — 잔치의 흥과 용남의 민망함이 함께 무르익던 그때, 도심에 의문의 유독가스가 살포됩니다. 하얀 가스가 거리를 삼키고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

    연회장 일행은 옥상으로 향하지만 문은 잠겨 있고 열쇠는 없습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정체성이 깨어납니다. 용남이 맨손으로 건물 외벽을 타고 옥상에 올라 문을 여는 것. 쓸모없다던 그 특기가 수십 명의 목숨줄이 되는 순간입니다. 구조 헬기가 오지만 정원 초과로 용남과 의주만 남고, 차오르는 가스를 피해 두 사람의 필사의 도심 클라이밍이 시작됩니다.

    이력서에 못 쓰는 재주가 목숨을 구하는 기술이 되는 이야기 — 엑시트의 모든 쾌감은 그 역전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조정석 임윤아: 매달리는 두 사람의 티키타카

    두 사람의 도심 종주는 이 영화의 몸통입니다. 15분짜리 정화통 방독면 하나, 옥상과 옥상 사이의 아득한 간격, 사다리와 로프와 맨손의 악력만으로 이어지는 사투. 중간에 학원에 갇힌 학생들을 발견하고는 어렵게 잡은 구조 헬기마저 양보해버리는 두 사람이라, 보는 쪽의 마음은 더 탑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한 장면 — 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진 두 사람을 향해 시민들의 드론 떼가 몰려와, 차오르는 가스를 날리며 길을 열어주는 순간. 마지막 타워크레인과 건물 사이의 로프, 그 절체절명 다음의 이야기는 극장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재난영화의 공식을 뒤집은 게 이 영화의 영리함입니다. 한국 재난물의 관습이라면 영웅적 전문가와 정부의 무능, 눈물의 희생이 나올 차례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백수고 무기는 클라이밍이며 눈물의 자리에 웃음이 있습니다. 재난은 진지하되 사람은 유쾌한 것. 위기의 순간에도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티키타카와 절박한 상황에서 터지는 몸개그가 긴장을 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응원할 힘을 줍니다.

    조정석은 이 영화의 발견이자 증명입니다. 한심함과 비범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코미디 감각에, 직접 소화한 티가 나는 액션까지. 임윤아도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히로인이 아니라 함께 뛰고 함께 매달리는 동반자로서 제 몫을 단단히 합니다. 둘의 관계를 로맨스로 서두르지 않고 전우애 쪽에 둔 것도 좋은 선택이었고요.


    볼만한가: 손바닥에 땀, 마음엔 사이다

    이 영화의 액션은 CG 물량이 아니라 맨몸의 물리력입니다. 잡을 곳과 디딜 곳을 관객도 같이 눈으로 찾게 되는 클라이밍 장면들은 손바닥에 땀을 옮기는 유형이라, 극장에서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주제가 명확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쓸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스펙 한 줄 안 되는 재주가 누군가를 살리는 기술이 되는 것, 취업 시장에서 낙방을 거듭하던 청년이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서는 것. 그래서 이 영화의 클라이밍은 은유로도 읽힙니다.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게 아니라, 다음 잡을 곳을 향해 손을 뻗는 것.

    드론 장면이 유독 뭉클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재난 앞에서 시스템은 늦고 무심했지만, 익명의 시민들은 각자의 장난감을 들고 하늘을 열어줬습니다. 아쉬움도 적습니다. 가스 사태의 원인과 배후는 헐겁게 처리되어 사실상 배경 장치에 그치고, 가족 캐릭터들의 활용도 초반 이후 옅어지며, 위기와 탈출의 반복 구조가 후반엔 다소 예측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하려던 일 — 두 시간 동안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끝내 웃으며 극장을 나서게 하는 것 — 을 기준으로 보면 임무 완수에 가깝습니다. 점수는 7점. 942만 관객이 괜히 든 게 아닙니다. 재난영화는 무겁고 신파라는 선입견이 있는 분, 시원한 오락이 필요한 밤에 정확히 맞는 처방입니다.


    두 가지 문답

    Q. 엑시트, 아이들과 같이 봐도 되나요?

    A. 12세 이상 관람가로, 온 가족 관람에 최적화된 재난물입니다. 잔인한 장면 없이 아슬아슬한 긴장과 웃음으로 굴러가는 유형이라 부모님 세대부터 초등 고학년까지 함께 즐기기 좋고, 실제로 명절 TV 단골 편성작이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만 손에 땀을 각오하시면 됩니다.


    Q. 결말이 궁금한데 이 글에 스포가 있나요?

    A. 없습니다. 건물 사이 로프가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까지만 다뤘고, 두 사람의 생사와 마지막 장면은 함구했습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결과보다 그 과정의 손맛이 전부라, 아무 정보 없이 매달려 보시는 게 가장 재미있는 관람법입니다.


    철봉 앞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저처럼 될 겁니다. 공원 철봉 앞에서 괜히 한 번 매달려보고, 3초 만에 겸손해지는 것. 그래도 내려오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내 안의 쓸모없는 특기는 뭐였더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재주 하나쯤 품고 사는 모든 용남들에게 이 영화를 권합니다. 그 재주가 빛날 날이 부디 재난의 날은 아니길 바라면서요. 저는 오늘도 매듭법을 연마하러, 아니 이삿날을 기다리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