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의 TV 명화극장에서 더 록과 아마겟돈을 보며 자란 세대가 있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초록 구슬을 든 채 벌벌 떨던 얼굴을 수십 번씩 돌려 본 세대. 그래서 백두산을 보는 내내 저는 이상한 기시감에 시달렸습니다. 처음엔 오마주인가 했는데, 보다 보니 아니었어요. 이 글은 그 기시감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줄거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3점입니다.백두산 영화 리뷰: 이상한 기시감의 정체줄거리부터 깔겠습니다. 백두산이 분화해 한반도가 흔들리고, 마지막 대폭발을 막을 방법은 하나 — 북한의 핵무기를 확보해 백두산 탄광 갱도에서 터뜨려 마그마방의 압력을 빼는 것. 폭발물 해체반 출신으로 전역을 코앞에 둔 조인창 대위(하정우)가 작전에 끌려가고, 핵..
반도를 처음 본 건 2020년 여름, 마스크를 쓰고 들어간 극장에서였습니다. 좌석은 한 칸씩 비어 있었고 팝콘도 못 먹던 시절. 텅 빈 새벽 거리를 지나 집에 오는데 방금 스크린에서 본 폐허의 서울과 마스크 뒤의 현실이 묘하게 겹쳐서 기분이 이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산행 4년 후의 세계를 그린 이 속편을 최근 다시 봤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입니다. 후반부 전개와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반도 영화 리뷰: 250만 달러짜리 귀향이야기는 부산행의 그 열차로부터 4년 뒤입니다. 좀비 바이러스가 한국을 집어삼켰고, 삼면이 바다인 반도는 그대로 버려진 땅이 됐습니다. 가까스로 홍콩으로 탈출했던 전직 군인 정석(강동원)은 난민 신세로 연명하다 홍콩 범죄조직의 ..
우리 집은 벽이 얇습니다. 옆집 부부가 무슨 예능을 보는지, 몇 시에 세탁기를 돌리는지 대충 알아요.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닌데도 어느새 옆집의 생활 리듬이 몸에 입력되어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했는데, 영화 이웃사촌을 보다가 그 기분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듣다 보면, 정이 듭니다. 정우와 오달수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도청 코미디 이야기이고, 결말은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이웃사촌 영화 리뷰: 벽 하나 사이의 시놉시스대선을 앞두고 3년 만에 귀국한 야당 총재 의식(오달수)은 공항에서 곧장 가택연금에 들어갑니다. 집은 군경으로 둘러싸이고 기자도 접근 불가. 명목은 연금이지만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니 사실상 감옥입니다. 그리고 그 담장을 유일하게 ..
개표방송을 새벽까지 본 적이 있습니다. 출구조사와 다르게 흘러가는 숫자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어요. 저 숫자 뒤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킹메이커를 다시 꺼내 본 건 그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이 블로그에 킹메이커 작품 리뷰는 따로 있어서, 오늘 글은 그 옆에 붙이는 각주입니다. 이 영화의 뿌리가 된 실존 인물들과, 달걀 우화로 끝나는 결말의 의미를 정리했습니다. 당연히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킹메이커 실화 정리: 그림자의 이력서부터1961년 강원도 인제. 약방을 하던 서창대(이선균)가 낙선을 거듭하는 야당 후보 김운범(설경구)을 무작정 찾아옵니다. 전쟁통에 이북에서 내려와 빨갱이로 몰려 죽을 뻔했다는 남자. 월급도 못 준다는 캠프에 제 발로 들어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며..
선릉역에서 2년을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점심 먹고 소화시킨다며 왕릉 담장 옆을 수도 없이 걸었는데, 정작 능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입장료가 천 원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주말에 영화 도굴을 뒤늦게 틀어놓고 좀 웃었습니다. 내가 커피 들고 어슬렁거리던 그 담장 아래로 누군가 이백 미터짜리 땅굴을 파고 있었다니.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아직 안 보신 분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도굴 영화 리뷰: 초코파이 껍질을 두고 가는 남자강동구(이제훈)는 땅 냄새만 맡아도 보물을 찾아낸다는 천재 도굴꾼입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뻔뻔하냐면, 절의 구층석탑에서 금동불상을 꺼내면서 도굴 현장에 초코파이 껍질을 그냥 두고 옵니다. 잡아보라는 거죠. 그 불상을 들고 골동품 상가를 돌면서 일부러 ..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를 보고 온 밤, 저는 이 유서 깊은 학교에 대한 감사(監査)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 개교 이래 한국 공포영화의 명문이었던 이 학교가 어쩌다 폐교 권고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미리 고지하면 최종 평점은 10점 만점에 2점이며,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와 함께 영화가 다룬 민감한 소재(학내 성범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평이 담백한 수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여고괴담 모교 리뷰: 학교 감사 보고서를 제출합니다감사 대상 학교의 연혁부터. 1998년 개교한 여고괴담은 한국 공포영화의 기념비였습니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과 산속 무덤에 갇혀 있던 한국 귀신 이야기를 학교라는 공간으로 데려온 공로, 그리고 톱스타들을 배출해온 등용문의 역사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