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에서 2년을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점심 먹고 소화시킨다며 왕릉 담장 옆을 수도 없이 걸었는데, 정작 능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입장료가 천 원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주말에 영화 도굴을 뒤늦게 틀어놓고 좀 웃었습니다. 내가 커피 들고 어슬렁거리던 그 담장 아래로 누군가 이백 미터짜리 땅굴을 파고 있었다니.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아직 안 보신 분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도굴 영화 리뷰: 초코파이 껍질을 두고 가는 남자강동구(이제훈)는 땅 냄새만 맡아도 보물을 찾아낸다는 천재 도굴꾼입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뻔뻔하냐면, 절의 구층석탑에서 금동불상을 꺼내면서 도굴 현장에 초코파이 껍질을 그냥 두고 옵니다. 잡아보라는 거죠. 그 불상을 들고 골동품 상가를 돌면서 일부러 ..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를 보고 온 밤, 저는 이 유서 깊은 학교에 대한 감사(監査)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 개교 이래 한국 공포영화의 명문이었던 이 학교가 어쩌다 폐교 권고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미리 고지하면 최종 평점은 10점 만점에 2점이며, 이 글에는 결말 스포일러와 함께 영화가 다룬 민감한 소재(학내 성범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평이 담백한 수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여고괴담 모교 리뷰: 학교 감사 보고서를 제출합니다감사 대상 학교의 연혁부터. 1998년 개교한 여고괴담은 한국 공포영화의 기념비였습니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과 산속 무덤에 갇혀 있던 한국 귀신 이야기를 학교라는 공간으로 데려온 공로, 그리고 톱스타들을 배출해온 등용문의 역사까지. ..
미드나이트를 보고 온 밤, 저는 목격자 진술조서를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범행 목격자가 주인공인 영화이니, 관객인 저도 이 영화라는 사건의 목격자로서 진술하는 게 어울릴 테니까요. 진기주와 위하준이 주연한 티빙 동시 공개 스릴러이며, 미리 진술하면 제 평점은 10점 만점에 2점입니다. 이 조서에는 결말을 포함한 치명적 스포일러가 있으니 열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미드나이트 영화 리뷰: 목격자 진술조서를 제출합니다사건 개요부터 진술합니다. 이 영화는 밤거리의 연쇄살인마 도식(위하준)과, 우연히 그의 범행 현장을 목격하게 된 청각장애인 수어 상담사 경미(진기주)의 추격전입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다는 것을 먼저 진술합니다. 말, 곧 언어는 힘이고 그 언어를 갖지 못한 ..
해피 뉴 이어를 보고 온 밤, 저는 호텔 엠로스의 컨시어지가 되어 층별 안내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영화의 모든 인연이 한 호텔에 투숙 중이니, 객실 안내가 곧 인물 안내인 셈이죠. 한지민, 이동욱, 이광수 등이 모인 연말 옴니버스 로맨스이며, 저의 채점은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 이 글에는 마지막 반전을 포함한 결말 스포일러가 있으니 체크인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해피 뉴 이어 영화 리뷰: 컨시어지 층별 안내를 시작합니다로비, 우리의 안내자 소진(한지민). 호텔 엠로스의 매니저인 그녀에게는 두 개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는 "올해 안에 고백을 받겠다"는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고백의 상대가 15년지기 친구 승효(이동욱)라는 것. 그런데 어느 술자리에서 승효가 폭탄을 떨어뜨립니다. "소진아, 나 결혼..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은행털이도 금고털이도 아닌, 땅속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는 도유(盜油) 범죄를 소재로 삼은 영화라니. 유하 감독의 2021년작 을 보고 온 밤,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관람기를 굴착 현장의 작업 일보 형식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충무로에서 익숙한 얼굴 조합이 아닌데도,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거든요.도유 범죄라는 소재, 그리고 이 팀이 꾸려지는 과정제가 직접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아무도 이 소재로 영화를 안 만들었지?"였습니다. 도유(盜油)란 지하에 매설된 송유관에 몰래 천공(穿孔), 즉 구멍을 뚫어 기름을 불법으로 빼내는 범죄입니다. 여기서 천공이란 드릴이나 착암기로 단단한 지층이나 관(管)에 구멍을 내는 작업을 뜻하는데, 영..
새해전야를 보고 온 밤, 저는 신년 운세 상담소를 차렸습니다. 새해 카운트다운으로 끝나는 4쌍 커플 옴니버스 로맨스이니, 네 커플을 손님으로 앉혀 운세를 풀이하는 형식이 어울릴 테니까요. 미리 고지하면 이 상담소의 최종 점수는 10점 만점에 4점, 커플들의 운세는 길하지만 영화의 사주가 문제였습니다. 이 글에는 네 커플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새해전야 영화 리뷰: 신년 운세 상담소를 엽니다첫 번째 손님, 도피운의 진아(이연희). 연애 6년 차에 스키장 비정규직인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같이 부은 적금의 제 지분만 챙겨 쿨하게 사라지는 전 남친. 오기와 충동에 휩싸인 진아는 "여기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한 장 주세요"를 외치고 적금을 몽땅 들고 아르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