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에서 2년을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점심 먹고 소화시킨다며 왕릉 담장 옆을 수도 없이 걸었는데, 정작 능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입장료가 천 원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주말에 영화 도굴을 뒤늦게 틀어놓고 좀 웃었습니다. 내가 커피 들고 어슬렁거리던 그 담장 아래로 누군가 이백 미터짜리 땅굴을 파고 있었다니.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아직 안 보신 분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도굴 영화 리뷰: 초코파이 껍질을 두고 가는 남자
강동구(이제훈)는 땅 냄새만 맡아도 보물을 찾아낸다는 천재 도굴꾼입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뻔뻔하냐면, 절의 구층석탑에서 금동불상을 꺼내면서 도굴 현장에 초코파이 껍질을 그냥 두고 옵니다. 잡아보라는 거죠. 그 불상을 들고 골동품 상가를 돌면서 일부러 소문을 내고, 미끼를 문 큰손들 사이에서 판을 키웁니다.
그런데 거래 현장에 윤 실장(신혜선)이라는 변수가 나타납니다. 멀쩡한 진품을 앞에 두고 눈 하나 깜짝 않고 "가짜네요"라고 감정해버리는 여자. 남의 거래를 통째로 깨놓고는 동구에게 웃으며 말합니다.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죠. 이 대사를 문화재를 사 모으는 쪽 사람이 한다는 게 이 영화의 농담입니다. 윤 실장은 동구를 카지노 호텔로 데려가 불상값으로 2억을 안기는데, 동구는 그 돈을 그날 밤 카지노에서 전부 날립니다. 전부요. 저는 이 대목에서 진심으로 소리를 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이 패기가 면접이 됩니다. 윤 실장은 동구를 스카우트하고, 동구는 동생 혜리와 함께 고분벽화 전문가 존스 박사(조우진)를 찾아가죠. 인디아나 존스에서 따온 게 뻔한 예명의 이 아저씨는 "이 일에서 손 뗀 지 오래됐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수락해요. 이런 데서 이 영화가 장르의 관습을 알고 슬쩍 비트는 게 보입니다.
중국 지안에서 고구려 벽화를 떼어 오는 작업이 성공하고, 물건은 스카이호텔 카지노 회장이자 문화재 재단 위원장인 진상길 회장에게 갑니다. 지하에 저 혼자만 들어가는 생체보안 수장고를 지어놓고 유물을 쟁여놓는 인간이에요. 그리고 동구가 그 앞에서 더 큰 판을 던집니다. 선릉 밑에 세종대왕의 보검, 전어도가 묻혀 있다. 임진왜란 때 이미 털린 무덤이라 아무것도 없다고 다들 믿는 바로 그 자리에. 부르는 값은 백억.
여기까지가 판이 깔리는 과정입니다. 불상에서 벽화로, 벽화에서 왕의 검으로. 판돈이 커질수록 각자의 속셈도 커집니다.
전어도 실존 유물: 보고 나서 검색하게 되는 것들
본작전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면, 선릉 옆 건물 지하에서 능 안쪽까지 이백 미터 땅굴을 한 달 안에 파는 대공사가 벌어집니다. 여기서 삽질의 달인 삽다리 아저씨(임원희)가 합류하는데, 강원도 파도까지 내다본다는 이 양반의 너스레가 후반부 웃음을 담당합니다. 재미있는 건 디테일이에요. 조선 왕릉의 관은 회격이라는,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석회층과 화강암이 감싸고 있어서 정면으로는 못 뚫고 상대적으로 얇은 바닥 쪽을 노려야 한다는 설정 같은 건 이 소재가 아니면 못 보는 재미입니다. 도굴 당일 밤 벌어지는 일들 — 각자 다른 계획을 품은 자들의 배신, 꺼져버린 발전기, 차오르는 물, 홀로 어디론가 향하는 윤 실장 — 은 여기 적지 않겠습니다. 이 판의 진짜 설계자가 누구였는지는 직접 확인하는 쪽이 낫습니다.
대신 보고 나서 제가 검색했던 것들을 정리해 둡니다. 이게 이 영화의 숨은 재미거든요.
전어도 — 실존합니다. 세종대왕과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어검이 실제로 있다는 걸 저는 이 영화 덕에 알았습니다
황영사, 구층석탑, 금동불상 — 전부 영화가 지어낸 가공의 유물입니다
극 중 세종대왕 어진 — 이제훈의 얼굴과 비슷하게 그려 넣었다는 제작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 실제 유물들을 모티브로 한 가공 설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분명히 긋고 갑니다. 영화는 도굴꾼을 매력적으로 그리지만, 현실의 도굴은 문화재와 그 역사적 맥락을 영영 잃게 만드는 중대한 범죄입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영화가 재미있는 것과 별개로 그 선은 긋고 봐야 하는 소재입니다.
볼만한가: 익숙한 요리, 신선한 재료
솔직히 말하면 익숙한 맛입니다. 사기꾼들이 팀을 짜고, 서로 속고 속이다가, 마지막에 판이 뒤집히는 한국 범죄 오락영화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캐릭터 배치도 어디서 본 조합이고, 반전의 방향도 이 장르를 좀 본 사람이면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색다른 걸 기대하고 앉으면 중반쯤 좀이 쑤실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미워지지 않는 건 소재의 힘입니다. 도굴이라니. 은행 금고와 카지노는 영화에서 수백 번 털렸는데 왕릉을 터는 영화는 처음이지 않나요. 이제훈은 뺀질거리는 사기꾼 연기가 의외로 몸에 잘 붙고, 조우진과 임원희가 치는 잔개그가 중간중간 늘어질 틈을 메웁니다. 신혜선은 웃는 얼굴로 속을 안 보여주는 인물을 맡아 판의 긴장을 담당하고요.
점수를 묻는다면 6점쯤 주겠습니다. 새로운 요리는 아닌데 재료가 신선해서 한 그릇 비우게 되는 영화. 머리 쓰는 케이퍼 무비의 치밀함을 원하는 분보다는, 일요일 오후에 배 깔고 부담 없이 웃을 영화를 찾는 분에게 맞습니다. 저는 다 보고 나서 다음에 선릉 앞을 지나면 천 원 내고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담장 밖에서 이백 미터 땅굴을 상상하면서요.
몇 가지 궁금할 것들
Q. 도굴에 나오는 전어도, 진짜 있는 유물인가요?
A. 네, 전어도는 실존하는 어검입니다. 다만 영화 속 황영사와 구층석탑, 금동불상은 가공의 유물이고, 선릉 아래에 전어도가 묻혀 있다는 설정 역시 영화적 상상입니다. 실존 유물과 허구를 섞어 짠 이야기라, 보고 나서 하나씩 검색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Q. 도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특정 실화의 영화화는 아닙니다. 다만 문화재 도굴과 은밀한 개인 수장고라는 소재 자체는 현실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어온 영역이라, 허구의 이야기에 현실의 그림자가 겹쳐 보이는 유형입니다. 그 점이 이 케이퍼 무비에 묘한 무게를 더합니다.
Q. 도굴, 아이들이나 부모님과 같이 봐도 되나요?
A. 12세 이상 관람가 수준의 무난한 오락영화라 가족 관람에 큰 부담은 없는 편입니다. 범죄가 소재인 만큼 도굴이 명백한 범죄라는 점만 아이들과 짚어주시면, 유물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라 오히려 대화거리가 생기는 쪽에 가깝습니다.
덧붙이며
글을 쓰다 보니 선릉역 시절 생각이 자꾸 납니다. 그때 담장 너머로 보이던 능은 그냥 잘 관리된 잔디 언덕이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아래 사백 년 넘게 지켜진 어둠이 있다는 게 새삼스럽더군요. 도굴은 그 어둠을 백억짜리 판돈으로 바꿔치기하는 상상력으로 두 시간을 끌고 가는 영화입니다. 걸작은 아니지만, 퇴근길에 왕릉 담장을 무심히 지나쳐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웃으며 볼만합니다.
결말이 궁금해지셨다면 그건 이 영화가 일을 제대로 했다는 뜻이고, 저는 여기서 입을 다물겠습니다. 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몫은 남겨두는 게 예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