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뉴 이어를 보고 온 밤, 저는 호텔 엠로스의 컨시어지가 되어 층별 안내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영화의 모든 인연이 한 호텔에 투숙 중이니, 객실 안내가 곧 인물 안내인 셈이죠. 한지민, 이동욱, 이광수 등이 모인 연말 옴니버스 로맨스이며, 저의 채점은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 이 글에는 마지막 반전을 포함한 결말 스포일러가 있으니 체크인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해피 뉴 이어 영화 리뷰: 컨시어지 층별 안내를 시작합니다로비, 우리의 안내자 소진(한지민). 호텔 엠로스의 매니저인 그녀에게는 두 개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는 "올해 안에 고백을 받겠다"는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고백의 상대가 15년지기 친구 승효(이동욱)라는 것. 그런데 어느 술자리에서 승효가 폭탄을 떨어뜨립니다. "소진아, 나 결혼..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은행털이도 금고털이도 아닌, 땅속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는 도유(盜油) 범죄를 소재로 삼은 영화라니. 유하 감독의 2021년작 을 보고 온 밤,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관람기를 굴착 현장의 작업 일보 형식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충무로에서 익숙한 얼굴 조합이 아닌데도,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거든요.도유 범죄라는 소재, 그리고 이 팀이 꾸려지는 과정제가 직접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아무도 이 소재로 영화를 안 만들었지?"였습니다. 도유(盜油)란 지하에 매설된 송유관에 몰래 천공(穿孔), 즉 구멍을 뚫어 기름을 불법으로 빼내는 범죄입니다. 여기서 천공이란 드릴이나 착암기로 단단한 지층이나 관(管)에 구멍을 내는 작업을 뜻하는데, 영..
새해전야를 보고 온 밤, 저는 신년 운세 상담소를 차렸습니다. 새해 카운트다운으로 끝나는 4쌍 커플 옴니버스 로맨스이니, 네 커플을 손님으로 앉혀 운세를 풀이하는 형식이 어울릴 테니까요. 미리 고지하면 이 상담소의 최종 점수는 10점 만점에 4점, 커플들의 운세는 길하지만 영화의 사주가 문제였습니다. 이 글에는 네 커플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새해전야 영화 리뷰: 신년 운세 상담소를 엽니다첫 번째 손님, 도피운의 진아(이연희). 연애 6년 차에 스키장 비정규직인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같이 부은 적금의 제 지분만 챙겨 쿨하게 사라지는 전 남친. 오기와 충동에 휩싸인 진아는 "여기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한 장 주세요"를 외치고 적금을 몽땅 들고 아르헨..
강릉을 보고 온 밤, 저는 이 영화를 등기부 등본처럼 열람하기로 했습니다. 아름다운 올림픽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잔혹극의 본질이, 결국 리조트 한 채의 소유권 이전 내역이기 때문입니다. 유오성과 장혁이 맞붙는 청소년 관람불가 범죄 누아르이며, 이 글에는 결말을 포함한 치명적 스포일러가 있으니 열람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강릉 영화 리뷰: 리조트 등기부를 열람하다표제부, 물건의 표시. 강릉 최대 조직이 최대주주로 올라 있는 대형 리조트. 관리인은 조직의 이인자 길석(유오성)입니다. 부하의 결혼을 제 일처럼 챙기고, 경찰 친구 방연과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며 공생하고, 조직 안의 분쟁은 조용히 안에서 정리하려는, 낡은 방식의 의리로 살아온 남자입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갑구 1번, 불길한..
주말 밤, 제 방을 옛날식 동시상영관으로 개조했습니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떡밥 천국 미스터리 2본 동시상영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여자의 이야기 '내일의 기억'과, 자고 일어났더니 인생이 뒤바뀐 남자의 이야기 '사라진 시간'입니다. 두 편 모두 결말은 철저히 함구하는 스포일러 없는 프로그램이니, 관람 전이신 분도 안심하고 입장하셔도 됩니다.미스터리 영화 추천 2편: 동시상영관 프로그램을 엽니다두 작품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묶는 열쇳말은 떡밥, 그러니까 이야기 곳곳에 던져둔 복선을 나중에 회수하는 재미입니다. 미스터리 장르의 만족도는 결국 이 회수의 설계에 달려 있는데, 오늘의 두 편은 그 설계 방식이 정반대라서 나란히 보면 더 재밌습니다. 1부 내일의 기억이 "범인은 누구인가"를 쫓는 정통 반..
여기부터 본문을 작성하세요.자산어보를 보고 온 밤, 저는 정약전의 방식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그가 흑산 바다의 물고기를 관찰해 어보(魚譜) — 물고기의 생김새와 성질, 쓰임을 기록한 도감 — 를 썼듯, 이 영화를 한 종의 어류로 놓고 항목별로 기록하는 겁니다. 결론부터 적으면 등급은 10점 만점에 7점, 이준익 감독의 또 하나의 수작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자산어보 리뷰: 이 영화를 어보(魚譜)로 기록하다항목 1, 명칭과 서식지. 속명 자산어보, 서식지는 상업 영화의 바다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수역입니다. 스스로를 상업영화 감독으로 규정해온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상업적으로 가장 피하고 싶은 것들만 골라 담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그 유명한 정약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