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 표가 생겨서 큰 기대 없이 극장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개봉일을 달력에 적고 있었습니다. 밝은 곳에서는 보지 못하고 어두워지면 조금 보이는 맹인 침술사가, 하필 왕세자의 마지막 밤을 목격해버린다는 설정. 영화 올빼미는 이 한 줄의 아이러니로 사극 스릴러의 새 문을 열었습니다. 각본을 100번 수정했다는 말이 허풍이 아니었습니다.올빼미 시사회 후기: 소리로 세계를 읽는 오프닝부터 다르다오프닝부터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어의 이형익이 궁에 들일 침술사를 선발하는 블라인드 테스트 장면인데, 수많은 지원자가 낙방하는 가운데 맹인 경수(류준열)가 소리만으로 진단을 내립니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다리를 절고 있었고, 숨소리 간격이 짧고 불규칙한 것이 성격이 조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해 풍을 부른 듯하옵니다...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이름만 들어도 영화가 몇 편은 나올 것 같은 라인업에 제작비 300억 원, 그리고 관상과 더 킹의 한재림 감독. 기대하지 않는 게 이상한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관람을 마치고 사고 조사관의 심정이 됐습니다. 이 기체는 분명 훌륭하게 이륙했는데, 어디선가 고도를 잃고 추락했습니다. 블랙박스를 판독하듯 구간별로 기록해 보겠습니다.영화 비상선언 리뷰: 이륙부터 순항까지, 전반부만큼은 진짜였다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야 합니다. 이 영화의 중반까지는 할리우드의 어떤 재난 영화에도 밀리지 않는 재미와 박진감,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인물들이 소개되고 기내 상황이 배치되는 방식, 그리고 빛의 활용까지. 저는 전반부를 감탄하면서 봤습니다.임시완이 연..
극장 티켓값이 14,000원까지 오른 시대, 개봉일을 못 잡은 한국 영화들이 넷플릭스 앞에 줄을 서고 있습니다. 설경구와 박해수의 만남, 첩보 누아르라는 장르. 이 조합에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죠. 그런데 저는 야차를 다 보고 나서 오락실 두더지 게임기 앞에 선 기분이 됐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부 스파이를 찾는 동안, 저는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문제점 두더지를 잡느라 바빴거든요.야차 리뷰: 인트로만큼은 진짜였다공정하게 좋았던 것부터 적겠습니다. 인트로는 진짜 괜찮았습니다.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 배신자를 무대포로 추격하는 야차 지강인(설경구), 그리고 실제 총기를 사용해 촬영했다는 말이 납득될 만큼 묵직하게 다가오는 총성. 배신자를 끝까지 쫓아가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오프닝 시퀀스 하나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그냥 때우기용으로 골랐습니다. 게임 원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어차피 게임 팬들 위한 팬서비스 아니냐"는 말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오프닝 5분 만에 그 생각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제작비 1,500억 원짜리 액션 어드벤처 《언차티드》,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빨랐습니다.언차티드 오프닝이 이미 물건이었던 이유영화는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 구조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인 메디아스 레스란 사건의 한가운데서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서사 기법으로, 고대 서사시에서부터 쓰여 온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원인 설명 없이 결과 한복판부터 던져놓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걸 아주 물리적으로 구현합니다. 푸른 하늘, 비행기에서 쏟아지는 화물들, 그 사이에서 매달..
제작비 130억 원, 전작 860만 관객의 바통을 이어받은 영화 . 오프닝에서 갤리온선을 몰고 등장하는 파마머리 해랑을 보자마자 저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 영화가 고증보다 판타지를 선택했다는 걸 첫 장면에서 대놓고 선언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습니다.해적 도깨비 깃발 개연성: 이 배는 처음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여말선초(麗末鮮初), 그러니까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설정인데, 해랑(한효주)이 타고 다니는 갤리온선(Galleon)이 등장합니다. 갤리온선이란 15~17세기 유럽에서 활약한 대형 범선으로, 콜럼버스가 1492년 바하마에 도착할 때 탔던 선박보다도 한 세대 뒤에 나온 배입니다. 영화 배경이 15세기 초임을 감안하면 시대가 100년 가까이 어긋..
극장에서 두 번 졸고, 한 번은 옆자리 팝콘 소리에 깼습니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을 보고 나오면서 제가 마음속으로 한 일은 마법사의 세계 해지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리포터 세계관의 프리퀄이라면 팬들의 향수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먹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극장에서 확인해 보니, 향수가 서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역으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 각본이 무너지면 설정도 무너진다저는 해리포터 직격 세대는 아닙니다. 뒤늦게 소설과 영화를 접했는데도 어린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으로 신비한 동물 사전 1편을 봤고, 에디 레드메인의 매력과 옵스큐러스라는 설정 덕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