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를 본 날의 상영관을 기억합니다.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고, 불이 켜진 뒤에야 사람들은 말없이 외투를 챙겼죠. 훌륭한 영화를 봤을 때의 흥분이 아니라, 훌륭한데 함부로 좋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영화를 봤을 때의 침묵. 그래서 이 글은 선언 하나로 시작합니다. 영화 조커를 칭찬하는 것은 극 중 인물 조커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을 장려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선을 긋고서야 할 수 있는 해석과 논란 정리를 담은 강스포 리뷰이고, 제 점수는 이 블로그 최고점인 10점 만점에 8.5점입니다.
조커 해석: 웃는 얼굴 위의 진짜 눈물
로미오와 줄리엣을 사랑한다는 것이 만난 지 며칠 된 미성년자들의 위험한 선택을 권장한다는 뜻이 아니듯, 작품에 대한 애정과 행위에 대한 판단은 다른 계좌입니다. 그 전제 위에서 아서 플렉을 봅시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광대 일을 하는 이 남자, 곱씹어 보면 환경에 비해 상당히 건실한 청년입니다. 싫은 내색 없이 병든 어머니를 부양하고, 약자를 조롱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동료가 억지로 쥐여준 총을 두고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 않느냐 되묻는 사람(출처: IMDb — Joker).
다만 그에게는 의지와 무관하게 웃음이 터지는 발작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발작이 터지는 순간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순간들이고, 그는 웃음 때문에 슬퍼할 여유조차 빼앗깁니다. 초반 분장실 장면이 그 비극을 요약하죠. 카메라는 아서의 얼굴을 세 번에 걸쳐 보여주는데, 처음엔 옆얼굴의 광대 분장으로, 두 번째엔 눈물인 줄 알았던 것이 분장이었음을, 세 번째에 이르러선 그 분장 위로 진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여줍니다. 폭행당해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코르사주의 붉은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도 같은 문법입니다. 원작에서 조커가 애용하는 깜짝 장난감이 여기서는 그가 입은 상처의 표식이 됩니다.
이 남자의 삶에 바늘이 하나씩 박힙니다. 도와달라 외쳐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거리, 삭감되는 복지와 끊기는 상담, 조롱과 폭력. 그리고 지하철의 그 밤. 여기서 연출의 선긋기가 정교합니다. 그에게 해를 입힌 세 남자는 여성을 희롱하고 집단 폭행을 가하던 무리였고 첫 방아쇠까지는 정당방위로 볼 여지가 있지만, 영화는 그 직후 도망치는 남자를 굳이 쫓아가 끝을 보는 아서의 비정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감독이 조커를 정당화하거나 우상화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장면이죠.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안전한 곳에 숨어든 아서는 후회가 아니라 해방감의 춤을 춥니다. 평생 오갈 데 없던 분노를 둑으로 막아두고만 살던 남자에게 총은 처음으로 주어진 목소리였던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 — 그가 태생적 괴물이 아니라 사회가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것, 이 영화의 질문은 거기에 있습니다.
웃음과 춤의 의미: 가면과 통로
이 영화의 상징 체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웃음과 춤의 대비입니다. 웃음이 세상에 맞추기 위한 가면이라면, 춤은 아서의 진짜 기쁨이 새어 나오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그의 춤이 언제 어디서 추어지는지가 감정의 지도가 되죠. 첫 해방의 춤은 홀로 숨어서, 조커가 된 후의 춤은 사람들 앞에서 — 그러나 끝까지 누군가와 '함께' 추는 춤은 없습니다. 딱 한 번 어머니와 춤추는 장면이 있지만, 어머니는 잠에 취해 아들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습니다. 함께인 듯 함께가 아닌 그 춤이 두 사람 관계의 축소판이고, 데이트를 했다는 아들에게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그 증거입니다.
이 영화의 지옥은 학대나 폭력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등장인물 중 콕 집어 악당이라 할 이는 없지만, 누구도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를 찬양하는 빈민들조차 광대를 자기 분노의 스위치로 소비할 뿐이고, 토마스 웨인도 머레이도 각자 편한 대로 그를 해석할 뿐이죠.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는 있는 상황. 그 정점이 머레이 쇼입니다. 많은 이들이 통쾌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그 대목을,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신념의 선언이 아니라 자조로 토해낸 곡성이기 때문입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확고한 철학의 악당이라면 이 조커는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그냥 기분이 나빴다고 답하는, 떼쓰는 어린아이에 가깝습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는 상상 장면이 증명합니다. 그가 꿈꾼 최대치의 사랑이 고작, 쇼호스트가 게스트에게 건네는 격려 한마디였다는 것. 그 작은 온기조차 끝내 허락되지 않자, 병상의 어머니마저 제 손으로 보낸 그는 생방송 무대에서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을 스스로 지워버립니다. 남은 것은 상징이 된 광대뿐 — 피로 그린 미소 위로 흐르는 눈물이 그 대가를 말해줍니다.
덧붙여 자막 이야기. 아서의 노트 속 문장은 동전과 의미라는 두 단어의 발음을 겹친 말장난 — 슬픔 속에서도 농담을 쓰는 사람이라는 캐릭터의 핵심 — 인데 우리 자막에선 그 언어유희가 오타처럼 보이게 옮겨졌고, 퇴근 기계를 주먹으로 치는 장면의 말장난도, 망상의 복선이었던 소피의 호칭도 증발했습니다. 이 디테일들이 살아야 마지막 대사, 농담을 말해줘도 당신은 이해 못 할 거라는 그 한마디가 아서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 됩니다. 국내 관객에겐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입니다.
웃음은 세상을 향한 가면, 춤은 홀로 남은 기쁨 — 끝까지 함께 춤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비극입니다.
폭력 미화 논란: 거울을 치운다고 문제가 사라질까
소외된 남성의 폭력이라는 소재가 현실의 비극과 겹쳐 보인다는 우려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려를 이해하는 것과 이 영화를 해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첫째, 이 영화는 조커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의 몰락에는 납득할 사연을 주되 그의 폭력에는 끝내 정당성을 주지 않는 이중의 설계 — 아동 시설에 총을 가져가 해고된 것도, 남의 집에 침입하고 기분에 따라 사람을 해치는 것도 전부 그 자신의 몫으로 보여주고, 그를 추앙하는 무리의 광기를 시민혁명이 아니라 맹신 집단처럼 그려낸 화면까지 — 를 영웅 서사로 읽는 것은 영화를 거꾸로 본 것입니다.
둘째, 대중이 영화와 현실을 구분 못 할 거라는 걱정은 오래된 기시감이 있습니다. 폭력적인 게임이 폭력을 만든다는 공포가 연구로 뒷받침되지 못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셋째, 잣대의 형평입니다. 범죄와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도 최고의 찬사를 받는 작품들이 즐비한데 유독 이 영화에만 위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올바름이 아니라 올바르다는 기분을 소비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거울이 보기 싫다고 거울을 치우면 문제는 보이지 않게 될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복지의 축소, 소외와 고립 — 이 영화에 나오는 것들은 전부 실존하는 문제들이고, 어떤 나라들은 고독을 담당하는 장관까지 두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는 것, 그것이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예술의 가장 오래된 방식입니다.
점수는 8.5점, 이 블로그의 최고점입니다. 만점이 아닌 이유도 적어두면, 감독이 직접 영향을 밝힌 스콜세지 고전들의 향취가 짙어 기시감이 있고 전개의 예측 가능성이 아쉽다는 것.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 기형적으로 마른 몸에 새긴 웃음과 눈물의 경계 — 와 이 영화가 던진 질문의 무게는 그 유보를 뚫고도 남습니다.
조심스럽게 세 가지
Q. 조커, 많이 잔인한가요? 수위가 걱정됩니다.
A. 국내 15세 이상 관람가로, 폭력 장면의 물리적 수위 자체는 청불 범죄물들보다 낮습니다. 다만 이 영화의 무게는 시각적 잔혹함이 아니라 정서적 하중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두 시간 동안 정면으로 지켜보는 영화라, 마음이 지쳐 있는 시기라면 컨디션이 괜찮은 날을 골라 보시길 권합니다.
Q.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같은 인물인가요?
A. 별개입니다. 이 영화는 기존 DC 영화들과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는 독립 작품이고, 두 조커는 캐릭터 해석 자체가 다릅니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기원 없는 순수한 혼돈의 화신이라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기원만으로 이루어진 인물이죠. 신념의 악당과 신념조차 없는 아이 — 같은 분장의 정반대 얼굴이라 비교해 보는 재미가 큽니다.
Q. 아서는 정말 토마스 웨인의 아들인가요? (스포일러)
A. 영화는 답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어머니 페니의 망상으로 정리되지만, 힘 있는 자가 기록을 만들었을 가능성의 여지도 화면 곳곳에 남겨두죠. 중요한 건 진위보다 그 질문이 아서에게 가졌던 의미입니다. 그가 원한 건 재산이 아니라 존재의 인정이었고, 그 인정이 끝내 거부당했다는 사실만은 어느 쪽이든 변하지 않으니까요.
정적이 걷힌 뒤
그날 상영관의 침묵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을 잃었던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저 광대의 외로움 어딘가에서 낯익은 그림자를 봤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웃어야 해서 웃어본 날들,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던 시절 같은 것들요.
그러니 이 영화를 보고 필요한 일은 조커를 흉내 내는 것도, 이 영화를 금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곁의 아서 플렉에게 안부를 묻는 것 — 그게 이 영화가 관객에게 허락한 유일한 실천일 겁니다. 오늘은 오래 연락 못 한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해야겠습니다. 가면이 아닌 웃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