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티켓값이 14,000원까지 오른 시대, 개봉일을 못 잡은 한국 영화들이 넷플릭스 앞에 줄을 서고 있습니다. 설경구와 박해수의 만남, 첩보 누아르라는 장르. 이 조합에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죠. 그런데 저는 야차를 다 보고 나서 오락실 두더지 게임기 앞에 선 기분이 됐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부 스파이를 찾는 동안, 저는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문제점 두더지를 잡느라 바빴거든요.야차 리뷰: 인트로만큼은 진짜였다공정하게 좋았던 것부터 적겠습니다. 인트로는 진짜 괜찮았습니다.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 배신자를 무대포로 추격하는 야차 지강인(설경구), 그리고 실제 총기를 사용해 촬영했다는 말이 납득될 만큼 묵직하게 다가오는 총성. 배신자를 끝까지 쫓아가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오프닝 시퀀스 하나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그냥 때우기용으로 골랐습니다. 게임 원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어차피 게임 팬들 위한 팬서비스 아니냐"는 말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오프닝 5분 만에 그 생각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제작비 1,500억 원짜리 액션 어드벤처 《언차티드》,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빨랐습니다.언차티드 오프닝이 이미 물건이었던 이유영화는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 구조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인 메디아스 레스란 사건의 한가운데서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서사 기법으로, 고대 서사시에서부터 쓰여 온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원인 설명 없이 결과 한복판부터 던져놓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걸 아주 물리적으로 구현합니다. 푸른 하늘, 비행기에서 쏟아지는 화물들, 그 사이에서 매달..
2014년 명량을 극장에서 봤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대사에 소름이 돋았던 그날부터 8년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한산도 대첩을 다룬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관람 전 제 나름의 브리핑을 시작했습니다. 진법, 수읽기, 그리고 만만치 않은 맞수. 이번엔 감정의 전투가 아닌 두뇌의 전투입니다.한산 용의 출현 관람 전 브리핑: 와키자카라는 맞수를 공부하다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명량에서 이순신의 상대였던 구루지마는 저돌적인 해적 대장 이미지였는데, 한산의 맞수로 등장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결이 다릅니다. 성을 지키는 대신 과감하게 나와 더 큰 것을 얻는 수를 아는 장수, 육전에서 기습 작전으로 조선 육군을 격파한 이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한산도 대첩이 일어나기 불과 한..
제작비 130억 원, 전작 860만 관객의 바통을 이어받은 영화 . 오프닝에서 갤리온선을 몰고 등장하는 파마머리 해랑을 보자마자 저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 영화가 고증보다 판타지를 선택했다는 걸 첫 장면에서 대놓고 선언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습니다.해적 도깨비 깃발 개연성: 이 배는 처음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여말선초(麗末鮮初), 그러니까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넘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설정인데, 해랑(한효주)이 타고 다니는 갤리온선(Galleon)이 등장합니다. 갤리온선이란 15~17세기 유럽에서 활약한 대형 범선으로, 콜럼버스가 1492년 바하마에 도착할 때 탔던 선박보다도 한 세대 뒤에 나온 배입니다. 영화 배경이 15세기 초임을 감안하면 시대가 100년 가까이 어긋..
극장에서 두 번 졸고, 한 번은 옆자리 팝콘 소리에 깼습니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을 보고 나오면서 제가 마음속으로 한 일은 마법사의 세계 해지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리포터 세계관의 프리퀄이라면 팬들의 향수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먹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극장에서 확인해 보니, 향수가 서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역으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 각본이 무너지면 설정도 무너진다저는 해리포터 직격 세대는 아닙니다. 뒤늦게 소설과 영화를 접했는데도 어린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으로 신비한 동물 사전 1편을 봤고, 에디 레드메인의 매력과 옵스큐러스라는 설정 덕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은 개봉 직후 글로벌 TOP 10에 진입하며 한국 액션 장르물의 새 기준점을 세웠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감상문 대신 인사평가서를 꺼냈습니다. 킬러의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우리 회사 이야기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길복순 업무역량: 수성펜 한 자루로 만점을 받은 이유오프닝에서 길복순이 수성펜 하나로 목검을 든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저는 속으로 인사평가서의 업무 역량 칸에 만점을 찍었습니다. 아무 무기도 없이 주변 사물을 즉각적으로 전술 도구로 전환하는 이 능력, 액션 장르 용어로는 임기응변 전술 적용(improvisational tactical response)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임기응변 전술 적용이란 사전에 계획된 무기 없이 현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