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물려받던 날을 기억합니다. 비싼 물건도 아닌데 손목에 차는 순간 이상하게 자세가 발라졌죠. 시계란 시간을 가리키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을 품는 물건이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영화 공작의 마지막 장면에 손목시계 하나가 등장합니다 — 그 시계가 왜 두 남자의 10년을 통째로 요약하는지, 이 글은 그 답을 향해 갑니다.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의 이 첩보극은 총성 대신 말과 눈빛으로 싸우는 영화이고, 믿기 어렵게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결말까지 담은 리뷰이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시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5점입니다.공작 영화 리뷰: 총성 없는 침투영화는 안대를 쓴 채 신문당하는 한 남자에서 시작합니다. 자백제까지 동원된 심문 — 그는 암호..
몇 년을 전화로만 거래하던 거래처의 김 대리를 처음 만난 날, 저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목소리로 그려온 몽타주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죠. 얼굴을 모르는 상대는 상상 속에서 자랍니다. 그 상상이 몇 년쯤 묵으면 확신이 되고요. 독전은 그 확신을 두 시간짜리 추적극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 아무도 얼굴을 모르는 마약 조직의 보스, '이선생'이라는 몽타주를 쫓는 이야기.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을 리메이크한 작품이고, 진하림을 연기한 김주혁 배우가 이 작품을 유작으로 남기고 2017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열연을 기억하며, 결말의 총성까지 담아 정리합니다. 스포일러에 유의하시고 —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독전 리뷰: 얼굴 없는 보스를 쫓다이야기는 한 소녀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마약팀..
몇 해 전 어느 봄, 휴대폰 달력이 알림을 띄웠습니다. 할머니 생신. 돌아가신 지 두 해가 지났는데 지우지 못한 알림이었죠.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해에도 결국 지우지 못했습니다. 그 날짜를 지우는 일이 꼭 한 사람을 한 번 더 보내드리는 일 같아서요. 영화 생일은 그 지우지 못하는 날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 날이라는 뜻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날들이라는 뜻 — 설경구와 전도연의 이 영화는 그 두 번째 뜻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생일 모임 장면은 이 글에 적지 않았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5점입니다.생일 영화 리뷰: 멈춰 있는 집해외에서 일하던 정일(설경구)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그는 불청객입..
우리 집안에는 가훈처럼 내려오는 잔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뭐든 해도 되는데 보증만은 서지 마라. 명절마다 듣던 그 말의 최악 시나리오를 두 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면 아마 이렇게 될 겁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애인의 사채 보증을 서줬다가 인생이 통째로 잡힌 남자와, 돈가방 하나를 둘러싸고 각자의 지푸라기에 손을 뻗는 짐승들의 이야기입니다. 전도연, 정우성, 배성우, 윤여정이 나오고, 이 글은 결말과 모든 인물의 운명을 담고 있으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리뷰: 사우나 캐비닛의 돈가방시작은 돈가방입니다. 평택의 사우나에서 일하는 중만(배성우)이 오픈 준비 중 캐비닛에서 명품 가방 하나를 발견합니다. 열어 보니 현금 다발. 치매를 ..
첫 직장에 다니던 시절, 승진 요건에 점수가 걸려 있어 새벽 토익 학원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출근 전 두 시간, 눈도 못 뜬 채 문법 문제를 풀면서 자주 생각했죠. 이 점수가 대체 내 일과 무슨 상관인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그 새벽의 질문을 1995년으로 가져간 영화입니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의 말단 삼총사가 토익책과 함께 회사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이고, 이 글은 결말까지 담고 있으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리뷰: 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1995년의 대기업 삼진그룹.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8년을 일해도 말단, 유니폼을 입고 커피를 타고 재떨이를 비우는 게 업무인 시대입니다. 회사가 내건 조건은 하나. 토익 600점을 넘기면 상고 출신..
주말 밤, 제 방을 옛날식 동시상영관으로 개조했습니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떡밥 천국 미스터리 2본 동시상영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여자의 이야기 '내일의 기억'과, 자고 일어났더니 인생이 뒤바뀐 남자의 이야기 '사라진 시간'입니다. 두 편 모두 결말은 철저히 함구하는 스포일러 없는 프로그램이니, 관람 전이신 분도 안심하고 입장하셔도 됩니다.미스터리 영화 추천 2편: 동시상영관 프로그램을 엽니다두 작품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묶는 열쇳말은 떡밥, 그러니까 이야기 곳곳에 던져둔 복선을 나중에 회수하는 재미입니다. 미스터리 장르의 만족도는 결국 이 회수의 설계에 달려 있는데, 오늘의 두 편은 그 설계 방식이 정반대라서 나란히 보면 더 재밌습니다. 1부 내일의 기억이 "범인은 누구인가"를 쫓는 정통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