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에는 가훈처럼 내려오는 잔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뭐든 해도 되는데 보증만은 서지 마라. 명절마다 듣던 그 말의 최악 시나리오를 두 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면 아마 이렇게 될 겁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애인의 사채 보증을 서줬다가 인생이 통째로 잡힌 남자와, 돈가방 하나를 둘러싸고 각자의 지푸라기에 손을 뻗는 짐승들의 이야기입니다. 전도연, 정우성, 배성우, 윤여정이 나오고, 이 글은 결말과 모든 인물의 운명을 담고 있으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리뷰: 사우나 캐비닛의 돈가방
시작은 돈가방입니다. 평택의 사우나에서 일하는 중만(배성우)이 오픈 준비 중 캐비닛에서 명품 가방 하나를 발견합니다. 열어 보니 현금 다발. 치매를 앓는 어머니(윤여정)와 아내, 서울에서 공부하는 딸까지 건사하며 먹고살기도 버거운 이 남자, 그러나 아직 양심을 팔 만큼은 아니어서 가방을 차마 들고 나가지 못하고 분실물로 일단 넣어둡니다. 그 망설임의 시간 동안 카메라는 이 가방에 얽힌 다른 짐승들을 챕터별로 순회합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출입국관리소 공무원 태영(정우성). 애인 연희의 사채 보증까지 서주며 순정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빚만 남기고 증발한 애인과, 섬뜩한 협박을 일삼는 악덕 사채업자 박사장(정만식)입니다. 궁지에 몰린 태영은 밀항 브로커가 낀 한탕 — 호구를 잡아 돈가방을 가로채는 판 — 을 계획하지만, 약속 당일 상대는 나타나지 않고 웬 형사만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한편 술집에서 일하는 미란(신현빈)은 사기로 전 재산을 날린 뒤 남편의 폭력에까지 시달리는 처지입니다. 손님으로 만난 남자 진태와 가까워진 그녀는 남편의 보험금을 노린 위험한 계획에 발을 들이는데, 교통사고로 위장하려던 그 계획은 첫 단추부터 어긋납니다. 일을 치른 뒤 집에 들어온 남편이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 그렇다면 그날 밤 진태가 해친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죄책감에 시름시름 앓으며 자수를 입에 올리는 진태, 또 다른 사건에 말려들기 싫어 충동적으로 그마저 정리해버리는 미란. 이 판의 톱니들이 이렇게 하나씩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정리: 여덟 짐승의 먹이사슬
챕터 구성 탓에 인물이 헷갈리는 분들을 위해 먹이사슬을 정리해 둡니다.
중만(배성우) — 돈가방을 처음 발견한 사우나 직원. 양심과 궁핍 사이의 소시민
태영(정우성) — 애인의 보증 빚에 잡힌 공무원. 한탕으로 벗어나려는 허세의 남자
연희(전도연) — 빚을 남기고 증발한 태영의 애인. 이 판에서 가장 큰 짐승
미란(신현빈)과 진태 — 보험금 계획으로 벼랑에서 뛰어내린 연인
박사장(정만식) — 웃는 얼굴이 더 무서운 사채업자. 판의 포식자를 자처하는 자
순자(윤여정) — 중만의 치매 어머니. 다 잊은 듯한 얼굴로 가장 오래 기억하는 사람
이 사슬의 정점은 중반에야 모습을 드러냅니다. 미란 앞에 나타난 유난히 친절한 술집 사장 — 남 일 같지 않다며 뒤처리를 하나하나 코치해주는 여자가 바로 연희입니다. 도와주는 척 곁을 지키던 그녀는 보험금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 미란을 배신해 모든 걸 차지하고, 새 신분으로 출국하기 위해 옛 애인 태영에게 태연히 돌아옵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얼굴로요.
여기서부터 도미노가 무너집니다. 태영의 집에 들이닥친 형사가 연희의 손에 스러지고, 태영은 연희의 차에서 문제의 돈가방을 발견하고, 가방을 쫓는 박사장 무리에게 쫓기던 태영은 도로 위에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가방의 행방을 쫓아 사우나까지 온 박사장과 연희, 시치미를 떼는 중만. 매듭이 잘려나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가방을 쥔 자, 쫓는 자, 판을 설계한 자 — 여덟 짐승의 사슬에서 살아남는 순서는 욕망의 크기와 정확히 반비례합니다.
결말 해석: 돈가방은 왜 그 집으로 돌아갔나
여기서부터 결말입니다. 박사장마저 연희의 반격에 스러지고, 판의 정점에 선 듯했던 연희 역시 자신이 밟고 온 원한에 터미널에서 발목을 잡혀 최후를 맞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의 주인공은 다시 중만네입니다. 돈가방에 눈이 멀었던 대가로 하나 남은 집이 화마에 사라지고 —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된다는 어머니의 말이 잿더미 위에 얹힙니다 — 터미널 화장실을 청소하던 중만의 아내가 라커 키 하나를 발견하면서, 돌고 돌던 돈가방은 결국 처음 그것을 열어봤던 가족에게 돌아옵니다. 두 번째 주인에게서는 과연 이 가방이 멈출까요. 영화는 그 물음표를 관객에게 넘기며 닫힙니다.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줄거리보다 설계에 있습니다. 이야기를 챕터로 나누고 시간 순서를 일부러 비틀어 배치해서, 관객은 각 챕터의 조각들이 사실 하나의 시간 위에 놓인 퍼즐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중만이 가방을 발견하는 첫 장면이 실은 이야기의 한복판이었다는 것, 태영이 기다리던 호구와 미란의 계획이 같은 밤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 조각이 맞을 때마다 극장 여기저기서 아, 하는 소리가 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주제의 판결 — 유일하게 가방을 두 번 쥐는 중만네가 이 판에서 가장 덜 움켜쥔 사람들이라는 배치. 욕망의 순위와 생존의 순위가 반비례하는 이 설계가, 영화가 짐승들에게 내리는 조용한 판결처럼 읽힙니다.
배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도연은 등장 자체가 챕터의 전환점인데, 판을 관망하다 삼키는 포식자의 여유와 지푸라기를 놓친 자의 바닥까지 한 인물 안에서 오갑니다. 정우성은 허세와 몰락 사이의 한심함을 기꺼이 연기하고 — 이 배우가 이렇게 구겨지는 영화가 드뭅니다 — 배성우의 소시민적 갈등, 윤여정의 서늘한 존재감, 신현빈의 벼랑 끝 얼굴까지 어느 챕터도 배우 때문에 처지지 않습니다. 아쉬움이라면 챕터 구성의 숙명으로 인물별 몰입이 끊기는 초반 진입장벽, 원작을 아는 관객에겐 반전의 낙차가 줄어든다는 점 정도. 점수는 7점입니다.
궁금한 두 가지
Q. 시간 순서가 헷갈립니다. 실제 순서로 정리하면요? (스포일러)
A. 실제 시간순으로는 태영과 연희의 빚, 미란과 진태의 계획이 먼저 벌어지고, 그 결과물인 돈가방이 사우나 캐비닛에 들어간 뒤에야 중만이 발견하는 첫 장면이 옵니다. 즉 영화의 오프닝은 이야기의 한복판이고, 각 챕터는 같은 시간대를 다른 인물의 눈으로 다시 도는 구조입니다. 이걸 알고 2회차를 보면 복선이 전부 다르게 보입니다.
Q. 원작이 있는 영화인가요?
A. 네, 소네 케이스케의 동명 일본 소설이 원작입니다. 영화는 배경을 한국 평택으로 옮기고 챕터 구성과 인물의 결을 새로 다듬었는데, 원작 소설의 건조한 톤과 영화의 배우 앙상블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반전을 아직 모르는 상태라면 영화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가훈에 한 줄 보태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우리 집 가훈이 왜 그 모양인지 알겠습니다. 보증만은 서지 마라. 이 한 줄 뒤에는 아마 누군가의 태영 같은 시절이 있었겠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그 잔소리의 값을 여덟 명의 인생으로 증명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다음 명절엔 저도 한 줄 보탤 생각입니다. 보증만은 서지 마라, 그리고 남의 가방은 열어보지도 마라. 잡으라고 내려온 지푸라기 중에, 돈가방 모양은 없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