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어느 봄, 휴대폰 달력이 알림을 띄웠습니다. 할머니 생신. 돌아가신 지 두 해가 지났는데 지우지 못한 알림이었죠.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해에도 결국 지우지 못했습니다. 그 날짜를 지우는 일이 꼭 한 사람을 한 번 더 보내드리는 일 같아서요. 영화 생일은 그 지우지 못하는 날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난 날이라는 뜻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날들이라는 뜻 — 설경구와 전도연의 이 영화는 그 두 번째 뜻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생일 모임 장면은 이 글에 적지 않았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5점입니다.생일 영화 리뷰: 멈춰 있는 집해외에서 일하던 정일(설경구)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그는 불청객입..
새해 다이어리의 첫 장에 버킷리스트를 적던 시절이 있습니다. 오로라 보기, 마라톤 완주, 피아노 다시 배우기 — 해가 바뀌어도 목록은 그대로였고, 언젠가부터는 적는 것조차 그만뒀죠. 시간이 많다고 믿는 사람의 여유였을 겁니다. 퍼펙트맨은 그 목록 앞에서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는 남자와, 시간밖에 없는 남자. 설경구와 조진웅의 블랙코미디이고, 이 글은 결말을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퍼펙트맨 리뷰: 시간이 없는 남자, 시간밖에 없는 남자영기(조진웅)는 부산 바닥의 건달입니다. 주먹 하나로 굴러온 인생이지만 요령은 없어서 조직에서도 밀려나는 신세죠. 사고를 치고 법정에 선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집행유예와 사회봉..
여기부터 본문을 작성하세요.자산어보를 보고 온 밤, 저는 정약전의 방식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그가 흑산 바다의 물고기를 관찰해 어보(魚譜) — 물고기의 생김새와 성질, 쓰임을 기록한 도감 — 를 썼듯, 이 영화를 한 종의 어류로 놓고 항목별로 기록하는 겁니다. 결론부터 적으면 등급은 10점 만점에 7점, 이준익 감독의 또 하나의 수작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자산어보 리뷰: 이 영화를 어보(魚譜)로 기록하다항목 1, 명칭과 서식지. 속명 자산어보, 서식지는 상업 영화의 바다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수역입니다. 스스로를 상업영화 감독으로 규정해온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상업적으로 가장 피하고 싶은 것들만 골라 담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그 유명한 정약용이..
친애하는 영화 팬 여러분, 저는 오늘 영화 킹메이커에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를 호소하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존경받지만 승리가 없던 정치인과, 그에게 승리를 안기겠다며 그림자에서 나타난 선거 전략가. 설경구와 이선균이 빛과 그림자로 갈라선 이 정치 드라마에 대해, 공약 제시와 후보 검증을 거쳐 정직하게 유세하겠습니다.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킹메이커 영화 리뷰: 독초를 약으로 쓰기로 한 정치인의 이야기킹메이커(kingmaker)란 자신이 왕이 되는 대신 왕을 만들어내는 사람, 현대 정치로 옮기면 후보를 당선시키는 막후의 전략가를 뜻합니다. 영화는 그림자 속의 남자 서창대(이선균)가 빛나는 사람 김운범(설경구)을 찾아가면서 시작됩니다. 존경받는 정치인의 모든 것을 갖췄지만 정작 승리가 없었던..
극장 티켓값이 14,000원까지 오른 시대, 개봉일을 못 잡은 한국 영화들이 넷플릭스 앞에 줄을 서고 있습니다. 설경구와 박해수의 만남, 첩보 누아르라는 장르. 이 조합에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죠. 그런데 저는 야차를 다 보고 나서 오락실 두더지 게임기 앞에 선 기분이 됐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부 스파이를 찾는 동안, 저는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문제점 두더지를 잡느라 바빴거든요.야차 리뷰: 인트로만큼은 진짜였다공정하게 좋았던 것부터 적겠습니다. 인트로는 진짜 괜찮았습니다.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 배신자를 무대포로 추격하는 야차 지강인(설경구), 그리고 실제 총기를 사용해 촬영했다는 말이 납득될 만큼 묵직하게 다가오는 총성. 배신자를 끝까지 쫓아가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오프닝 시퀀스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