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퍼펙트맨 리뷰 (줄거리, 배우, 신파)

Stv 2026. 9. 29. 08:06

목차


    새해 다이어리의 첫 장에 버킷리스트를 적던 시절이 있습니다. 오로라 보기, 마라톤 완주, 피아노 다시 배우기 — 해가 바뀌어도 목록은 그대로였고, 언젠가부터는 적는 것조차 그만뒀죠. 시간이 많다고 믿는 사람의 여유였을 겁니다. 퍼펙트맨은 그 목록 앞에서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는 남자와, 시간밖에 없는 남자. 설경구와 조진웅의 블랙코미디이고, 이 글은 결말을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



    퍼펙트맨 리뷰: 시간이 없는 남자, 시간밖에 없는 남자

    영기(조진웅)는 부산 바닥의 건달입니다. 주먹 하나로 굴러온 인생이지만 요령은 없어서 조직에서도 밀려나는 신세죠. 사고를 치고 법정에 선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 — 그렇게 등 떠밀려 가게 된 곳이 고급 요양병원입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봉사라고 해봐야 마지못해 하는 시늉인 그의 앞에 인생 최악의 상전이 나타납니다. 장수(설경구). 잘나가는 변호사였으나 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입니다. 영화 초반, 그가 연명의료 항목의 인공호흡기 사용을 거부하겠다고 서명하는 장면은 이 인물의 성격을 요약합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제 방식대로, 흐트러짐 없이 마무리하겠다는 고집. 그 고집은 간병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양복을 갖춰 입어야 예의라는 둥 모든 일을 제 기준으로 검토하겠다는 둥 영기의 속을 뒤집습니다. 간병하면서 양복 입기는 처음이라는 영기의 투덜거림처럼, 물과 기름인 두 사람의 티격태격이 전반부의 코미디를 담당하죠.


    설경구 조진웅: 기묘한 거래, 뜻밖의 우정

    그런 두 사람을 한 배에 태우는 것이 이 영화의 설정, 기묘한 거래입니다. 장수가 제안하죠.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걸 테니,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 — 죽기 전에 해야 할 것들 — 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 시간이 없는 남자는 제 마지막을 근사하게 마무리할 손발을 얻고, 돈이 없는 남자는 새 인생의 밑천을 약속받는 계약입니다. 명분과 흑심이 반반 섞인 이 동행이 시작되면서 까칠한 변호사와 무식한 건달은 서로의 세계를 처음으로 구경하게 됩니다. 함께 술잔을 부딪치고 — 이제 술 한잔 따라주지는 못해도 같이 마실 수는 있지 않느냐는 대사가 짠합니다 — 못 가본 곳에 가고, 서로에게 없던 것을 배우는 날들. 거래로 시작한 관계가 우정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질수록 관객은 알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동행의 끝에는 정해진 이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후반은 두 남자의 각자 남은 숙제로 향합니다. 영기에게는 발을 빼려는 조직과의 정산 — 조폭을 그만두고 동생과 함께 살겠다는 소박한 꿈과 그 꿈을 가로막는 판돈들 — 이 있고, 장수에게는 나빠지는 병세와, 성공 가도에서 놓쳐버린 관계들과의 화해라는 마지막 과제가 있습니다. 거래의 명분이었던 버킷리스트가 사실은 두 사람 모두의 인생 숙제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셈이죠. 그 숙제들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이 우정이 어떤 끝을 맞는지는 극장의 몫으로 남깁니다.

    이 영화의 자산은 명백합니다. 설경구와 조진웅 — 두 배우의 얼굴만으로 성립하는 장면이 많아요. 설경구는 까칠함 아래 고이는 쓸쓸함을, 조진웅은 무식함 아래 숨은 순정을 능숙하게 꺼내 보이고, 둘의 티키타카는 대본의 빈 곳을 연기로 메웁니다. 블랙머니의 그 집요한 검사와 같은 해에 정반대 온도의 얼굴을 꺼낸 조진웅의 스펙트럼도 새삼스럽습니다.

    시간이 없는 남자는 손발을 얻고 돈이 없는 남자는 밑천을 얻는 거래 — 그러나 이 계약서의 진짜 조항은 우정이었다는 것이 영화의 마음입니다.

    볼만한가: 전반의 품위, 후반의 기시감

    죽음을 다루는 태도에 미덕이 있습니다. 시한부 소재의 영화들이 흔히 빠지는 눈물의 착취 대신, 이 영화의 전반부는 죽음 앞에서도 유머와 품위를 지키려는 한 인간의 고집을 경쾌하게 그립니다. 연명의료 거부 서명 같은 장면을 비장함이 아니라 캐릭터의 개성으로 처리하는 감각은, 마무리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존엄의 문제를 무겁지 않게 관객에게 건네죠.

    문제는 후반입니다. 전반부가 아껴둔 눈물을 후반부가 한꺼번에 청구하면서, 경쾌하던 블랙코미디는 익숙한 신파의 경로로 미끄러집니다. 조직 정산 서사는 이 따뜻한 이야기에 굳이 필요했나 싶게 상투적이고, 감정의 진폭이 커질수록 음악과 플래시백이 앞서 나가며, 예정된 이별을 향해 가는 길이 예상 그대로라 먹먹함보다 기시감이 앞섭니다. 버디 코미디와 신파 드라마와 조폭물 — 세 장르를 오가다 어느 하나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인상은 뺑반 리뷰에서 적었던 그 교차로의 문제와 닮았습니다.

    점수는 5점. 두 배우의 합을 보는 값으로는 충분하나 그 합이 아까운 각본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남긴 질문 하나는 오래 갑니다. 시간이 없는 남자는 목록을 실행했는데, 시간이 있다고 믿는 우리는 왜 적어만 두는가.


    두 가지 문답

    Q. 이 글에 결말 스포가 있나요?

    A. 없습니다. 두 사람의 거래와 동행, 각자의 숙제가 놓이는 지점까지만 다뤘고, 그 숙제들의 마무리와 이 우정의 마지막 풍경은 함구했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은 반전보다 여운으로 기억되는 유형이라, 그 온도는 직접 확인하시는 쪽을 권합니다.


    Q. 이런 결의 영화가 좋다면 이어 볼 작품은요?

    A. 이 장르의 원형 격인 버킷리스트(2007)가 정석 코스입니다. 죽음을 앞둔 두 남자가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실행하는 이야기의 교과서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두 남자의 우정이라는 결이 좋았다면, 이 블로그에서 다룬 나의 특별한 형제도 권합니다. 웃다가 뭉클해지는 순서까지 닮은, 더 단단한 각본의 짝입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처럼

    영화를 보고 온 밤, 몇 년 만에 다이어리 첫 장을 다시 펼쳤습니다. 오로라 보기, 마라톤 완주, 피아노 다시 배우기 — 목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미뤄온 건 시간이 아니라 저였다는 걸 인정해야 했죠.

    그래서 이 어중간한 영화의 확실한 효능 하나를 적어둡니다. 극장을 나서면 목록의 첫 줄이 눈에 밟힌다는 것. 오로라는 여전히 멀지만, 피아노 학원 상담 예약쯤은 시간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 해버리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의 첫 줄은 무엇인가요 — 이 영화를 핑계 삼아, 오늘 하나만 해치워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