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에서 2년을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점심 먹고 소화시킨다며 왕릉 담장 옆을 수도 없이 걸었는데, 정작 능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입장료가 천 원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주말에 영화 도굴을 뒤늦게 틀어놓고 좀 웃었습니다. 내가 커피 들고 어슬렁거리던 그 담장 아래로 누군가 이백 미터짜리 땅굴을 파고 있었다니.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아직 안 보신 분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도굴 영화 리뷰: 초코파이 껍질을 두고 가는 남자강동구(이제훈)는 땅 냄새만 맡아도 보물을 찾아낸다는 천재 도굴꾼입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뻔뻔하냐면, 절의 구층석탑에서 금동불상을 꺼내면서 도굴 현장에 초코파이 껍질을 그냥 두고 옵니다. 잡아보라는 거죠. 그 불상을 들고 골동품 상가를 돌면서 일부러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은행털이도 금고털이도 아닌, 땅속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는 도유(盜油) 범죄를 소재로 삼은 영화라니. 유하 감독의 2021년작 을 보고 온 밤,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관람기를 굴착 현장의 작업 일보 형식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충무로에서 익숙한 얼굴 조합이 아닌데도,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거든요.도유 범죄라는 소재, 그리고 이 팀이 꾸려지는 과정제가 직접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아무도 이 소재로 영화를 안 만들었지?"였습니다. 도유(盜油)란 지하에 매설된 송유관에 몰래 천공(穿孔), 즉 구멍을 뚫어 기름을 불법으로 빼내는 범죄입니다. 여기서 천공이란 드릴이나 착암기로 단단한 지층이나 관(管)에 구멍을 내는 작업을 뜻하는데, 영..
청불 등급 영화가 680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수치, 지금 봐도 쉽게 납득이 안 됩니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청불 등급은 그 자체로 전체 관객의 30~40%를 차단하는 구조인데, 범죄도시 1편은 그 핸디캡을 정면으로 뚫었습니다. 최신편을 극장에서 보고 나온 날 밤, 저는 2017년 1편을 다시 틀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왜 시작될 수 있었는지, 몸으로 다시 확인했습니다.청불 등급으로 680만, 이 수치가 말하는 것범죄도시 1편은 2017년 10월 개봉해 최종 누적 관객 수 688만 명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청불 등급, 즉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가 이 숫자를 달성한다는 것은 단순한 흥행이 아닙니다.여기서 청불 등급이란 만 18세 미만의 관객이 관람할 수 없는 영화등급 ..
조희팔 사건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이게 현실인지 의심했습니다. 피해자 수만 명, 피해액 수조 원. 그 사건을 정면으로 가져온 영화가 바로 마스터입니다. 개봉 당시 별 기대 없이 극장에 앉았다가, 오프닝 10분 만에 자세를 고쳐 앉게 됐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 오락영화가 이 정도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제 경험상 예상 밖이었습니다.실화 배경 — 조희팔 사건과 영화가 닮은 것들마스터의 악당 진현필 회장은 실존 인물 조희팔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조희팔 사건은 2000년대 중반 국내 최대 규모의 유사수신행위 사기로, 피해자가 약 7만 명, 피해액이 4조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출처: 경찰청). 유사수신행위란 금융당국의 인가 없이 불특정 다수로부터 투자금을 받아 높은 이자·배당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