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을 전화로만 거래하던 거래처의 김 대리를 처음 만난 날, 저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목소리로 그려온 몽타주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죠. 얼굴을 모르는 상대는 상상 속에서 자랍니다. 그 상상이 몇 년쯤 묵으면 확신이 되고요. 독전은 그 확신을 두 시간짜리 추적극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 아무도 얼굴을 모르는 마약 조직의 보스, '이선생'이라는 몽타주를 쫓는 이야기.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을 리메이크한 작품이고, 진하림을 연기한 김주혁 배우가 이 작품을 유작으로 남기고 2017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열연을 기억하며, 결말의 총성까지 담아 정리합니다. 스포일러에 유의하시고 —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독전 리뷰: 얼굴 없는 보스를 쫓다이야기는 한 소녀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마약팀..
새해 다이어리의 첫 장에 버킷리스트를 적던 시절이 있습니다. 오로라 보기, 마라톤 완주, 피아노 다시 배우기 — 해가 바뀌어도 목록은 그대로였고, 언젠가부터는 적는 것조차 그만뒀죠. 시간이 많다고 믿는 사람의 여유였을 겁니다. 퍼펙트맨은 그 목록 앞에서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는 남자와, 시간밖에 없는 남자. 설경구와 조진웅의 블랙코미디이고, 이 글은 결말을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퍼펙트맨 리뷰: 시간이 없는 남자, 시간밖에 없는 남자영기(조진웅)는 부산 바닥의 건달입니다. 주먹 하나로 굴러온 인생이지만 요령은 없어서 조직에서도 밀려나는 신세죠. 사고를 치고 법정에 선 그에게 내려진 판결은 집행유예와 사회봉..
며칠 전 새벽 두 시, 차 한 대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저는 빨간불을 지키며 서 있었습니다. 건너편에도 사람이 없는데 그냥 서 있었어요. 서 있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건 원칙인가, 습관인가, 아니면 그냥 겁인가. 경관의 피를 보고 나서 그 새벽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이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묻는 게 정확히 그 질문이거든요. 정의를 행하는 손은 깨끗해야 하는가. 조진웅과 최우식이 그 질문을 사이에 두고 맞서는 영화이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 아래부터는 결말까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경관의 피 리뷰: 유리지갑 반장의 벤츠신참 경찰 민재(최우식)는 동료가 용의자에게 과한 폭력을 쓴 사건에서, 같은 식구를 덮어주는 대신 법정에서 사실대로 증언하는 인물입니다. 정의로운 건지 아직 어린 건지..
주말 밤, 제 방을 옛날식 동시상영관으로 개조했습니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떡밥 천국 미스터리 2본 동시상영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여자의 이야기 '내일의 기억'과, 자고 일어났더니 인생이 뒤바뀐 남자의 이야기 '사라진 시간'입니다. 두 편 모두 결말은 철저히 함구하는 스포일러 없는 프로그램이니, 관람 전이신 분도 안심하고 입장하셔도 됩니다.미스터리 영화 추천 2편: 동시상영관 프로그램을 엽니다두 작품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묶는 열쇳말은 떡밥, 그러니까 이야기 곳곳에 던져둔 복선을 나중에 회수하는 재미입니다. 미스터리 장르의 만족도는 결국 이 회수의 설계에 달려 있는데, 오늘의 두 편은 그 설계 방식이 정반대라서 나란히 보면 더 재밌습니다. 1부 내일의 기억이 "범인은 누구인가"를 쫓는 정통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