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동물원에서 미동도 없는 호랑이를 한참 보다가 아빠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거 인형 아니야? 그날의 의심이 영화가 됐다면 아마 이런 모양일 겁니다. 해치지않아는 그 농담을 아예 사업 모델로 만들어버린 코미디입니다. 극한직업을 만든 제작사의 후속작이고, 안재홍과 강소라가 동물 탈을 뒤집어씁니다. 결말의 구체적인 내용은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6.5점입니다.
해치지않아 리뷰: 동물 없는 동물원의 개장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로펌의 만년 수습 태수(안재홍)가 정직원 전환을 조건으로 망해가는 동물원 '동산파크'의 회생 미션을 떠안는데, 가서 보니 동물원에 정작 동물이 없습니다. 돈 되는 동물들은 이미 팔려 나간 뒤였죠. 궁지에 몰린 태수와 사육사들이 내놓은 해법이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동물 탈을 쓰자(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북극곰, 고릴라, 사자, 나무늘보의 특수 탈을 뒤집어쓴 직원들의 위장 동물원이 개장하고, 어느 날 북극곰이 콜라를 마시는 장면이 목격되면서 동산파크는 전국구 명소가 됩니다. 사람이 동물인 걸 들키면 끝나는 동물원이라니, 설정만 들으면 코웃음이 나오는데 이 영화의 재주는 그 코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관람객과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북극곰 수칙 브리핑, 그리고 기어이 눈이 마주쳤을 때의 그 정적. 극장에서 이 장면들에 웃음이 터지는 순간, 설정에 대한 의심은 입장료와 함께 반납하게 됩니다.
동물이 없어서 사람이 동물이 되는 동물원 — 이 한 줄의 무리수를 두 시간의 웃음으로 바꾸는 것이 이 영화의 기술입니다.
극한직업 제작사: 같은 뻔뻔함, 반대의 리듬
극한직업의 이름을 걸고 나온 코미디라 비교를 피할 수 없는데, 재미있는 건 웃기는 방식이 정반대라는 점입니다. 극한직업이 빠른 티키타카로 관객이 예상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속도를 늦춰서 웃깁니다. 어색한 순간을 한 박자 길게 눌러 관객이 상상할 시간을 준 다음, 예상과 다른 리액션으로 터뜨리는 방식이죠. 빠른 코미디는 재미없는 장면도 금방 지나가 기억에 안 남지만, 느린 코미디는 그 장면을 통째로 기억하게 만듭니다.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대부분 '멈춘 동물'의 순간들인 이유입니다.
콜라 먹는 북극곰이라는 무리수 설정도 의외로 잘 넘어갑니다. 인위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우연한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겹치게 설계했고, 그 상황들이 앞서 깔아둔 요소들 — 복선인 줄도 몰랐던 소품과 습관들 — 로 굴러가서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극한직업에서도 느꼈던 그 특유의 뻔뻔함, 쭈뼛거리지 않고 대놓고 뻔뻔해서 오히려 자연스러워지는 화법이 여기서도 통합니다.
배우들 이야기도 해야죠. 캐스팅이 화려하진 않지만 전원이 기본기로 제 몫을 하고, 그중 박영규는 이 영화의 발견입니다. 배우 특유의 목소리 톤과 표정이 서 원장이라는 인물에 그대로 흡수되어, 연기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보입니다. 극한직업의 신하균처럼 의외의 얼굴로 등장하는 특별 출연의 반전도 깨알 재미고요. 아쉬운 건 케미입니다. 각자는 웃긴데 둘이 만나 새로운 걸 만드는 장면이 적어요. 티키타카 없는 코미디라는 정체성의 대가인 셈입니다.
볼만한가: 탈 속에서 보이는 유리벽 바깥
이 영화가 단순 소동극에 그치지 않는 건 동물원의 현실을 대하는 태도 덕분입니다. 영화는 동물 보호와 연구를 겸하는 동물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 실제로 국내에도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원들이 있습니다 — 반대편의 그늘도 슬쩍 보여줍니다. 동물에게 물건을 던지는 관람객들, 그리고 탈을 쓴 채 구경거리가 되어보고서야 알게 되는 시선의 스트레스. 사람이 동물의 자리에 서보는 이 설정 자체가 유리벽 저쪽의 심정을 간접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인 셈이죠. 영리한 건 수위 조절입니다. 설교하듯 주입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알아챌 만큼만 최소한으로 흘려서, 동물원에 대해 어떤 입장이든 보고 나면 할 말이 생기게 만듭니다.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공존의 방법을 묻는 태도. 코미디가 사회적 질문을 품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서도 적습니다. 한국 코미디의 고질병 — 중후반 메인 사건에서 갑자기 진지해지는 그 구간 — 이 이 영화에도 있긴 합니다. 다만 처지는 와중에도 간간이 웃음을 심어 코미디라는 걸 잊지 않게 하고, 클라이맥스에선 오히려 공포영화 같은 긴장의 장면을 꺼내 드는데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라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결말 — 동물 없는 동물원이라는 우스운 설정이 뒤집어 보면 꽤 이상적인 질문이 된다는 것. 영화는 그 질문에 완벽한 정답 대신 이런 방법도 있다는 제안으로 답하고, 저는 그 겸손한 착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극장의 몫으로 남깁니다.
점수는 6.5점. 12세 관람가답게 누구와 봐도 부담이 없고, 보는 동안만큼은 딴생각할 틈 없이 마음 편히 웃게 되는 영화입니다. 코미디는 취향을 타니 반응이 갈릴 수 있지만, 신선한 소재에 사회적 이야기를 이만큼 매끄럽게 접붙인 한국 코미디는 귀합니다. 이런 영화가 자주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두 가지 문답
Q. 극한직업만큼 웃긴가요?
A. 웃음의 총량은 극한직업이 위지만, 방식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 극한직업이 쉴 새 없는 말맛의 폭격이라면 해치지않아는 어색한 정적으로 웃기는 슬로 코미디에 가깝거든요. 수원왕갈비통닭 같은 폭발력은 없어도, 눈 마주친 북극곰의 정적 같은 오래 남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Q. 웹툰 원작과 같은 이야기인가요?
A. 아닙니다. 동명 웹툰에서 '사람이 동물 탈을 쓰고 운영하는 동물원'이라는 설정만 가져오고, 인물과 사건은 영화만의 이야기로 새로 풀었습니다. 원작을 본 분도 스포일러 걱정 없이 새 이야기로 즐길 수 있고, 원작과 각색의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유리벽 앞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동물원의 유리벽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저쪽에서 이쪽을 보는 눈에 대해, 던져지는 것들과 쏟아지는 시선에 대해, 웃다가 문득 생각하게 되거든요. 설교 한 줄 없이 그 생각을 심어놓는 게 이 코미디의 진짜 재주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동물원에 가면, 미동 없는 호랑이에게 그때처럼 물어볼 생각입니다. 저기요, 혹시 안에 누구 계세요? 만약 정적 끝에 눈이 마주친다면 —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건 꽤 반가운 인사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