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를 보고 나온 날, 저는 극장이 아니라 미술관에 다녀온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리뷰도 도슨트 — 미술관에서 작품을 해설하며 관람을 안내하는 사람 — 의 투어처럼 쓰려 합니다.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를 휩쓴 클로이 자오 감독, 범지구적 캐스팅, 우주의 시작까지 확장한 세계관. 재료만 보면 걸작이 나와야 했던 이 영화가 왜 마블 최저 평점권의 혹평을 받았는지, 전시실을 하나씩 돌며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터널스 리뷰: 미술관에 다녀온 기분이 든 이유
전시 1관은 풍경화의 방입니다. 이 영화의 화면들은 상당수가 매직아워(magic hour) — 해가 뜨거나 지기 직전, 부드럽고 따뜻한 자연광이 도는 짧은 시간대 — 에 촬영되었습니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빛의 활용이고, 숲속 액션 장면들에서는 카메라를 한 사람의 시선처럼 움직여 현장감을 만드는 레버넌트풍 촬영이 이어집니다. 이카리스가 습격당하는 장면은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가 곰에게 당하는 장면이 겹쳐 보일 정도입니다.
그림 자체는, 인정하겠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마블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화면의 미감이고, 이 화법이 오히려 신선했다는 관객도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티켓을 끊은 곳이 미술관이 아니라 히어로 영화관이라는 점입니다. 기획 단계만 보면 이 영화는 실패할 수 없는 프로젝트처럼 보였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의 클로이 자오를 영입하고,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한 다국적 캐스팅을 완성하고, 우주의 시작과 인류사 전체로 세계관을 확장하고, 거대한 제작비와 CG를 투입했으니까요. 그런데 완성된 결과물은 2시간 30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영화였고, 평단의 반응도 마블 시리즈 최저 수준에 머물렀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 Eternals).
좋은 재료들이 어쩌다 이런 요리가 되었는지, 다음 두 전시실에서 원인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요약: 매직아워의 아름다운 화면은 인정하지만, 히어로 영화관에서 풍경화 전시를 만난 미스매치가 이 영화의 첫인상입니다.
혹평 이유: 열 명의 초면 히어로와 균등 분량의 저주
전시 2관은 초상화의 방입니다. 초상화가 무려 열 점 걸려 있는데 전부 초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습니다. 히어로는 능력이 곧 개성이고, 그 개성을 강렬하게 압축하는 상징이 있어야 합니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좋은 예입니다. 방패는 선제공격의 무기가 아니라 달려드는 상대를 막는 도구이고, 그래서 캡틴이라는 캐릭터는 공격자가 아닌 '최후의 보호자'로 상징됩니다. 그 상징 하나가 관객에게 각인되기까지 단독 영화 세 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터널스의 열 명은 한 편 안에서 탄생부터 성장, 이별, 동료의 죽음, 거대한 비밀, 수천 년 동지들의 분열과 내전까지 전부 소화해야 합니다.
이카리스: 눈에서 빔을 쏘며 비행 — 슈퍼맨의 기시감
마카리: 초고속 이동 — 퀵실버·플래시 계열 스피드스터
드루이그: 정신 지배 — 프로페서 X를 연상
길가메시(마동석): 괴력 — 헐크와 유사 / 파스토스: 기계 발명 — 아이언맨 / 테나: 전투의 화신 — 원더우먼
표절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서 본 능력들뿐이고, 냉정하게 말해 유니크한 능력은 물질을 변환하는 세르시 한 명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캐릭터가 이렇게 많으면 몇몇의 비중을 과감히 줄이는 게 정석입니다. 엑스맨 시리즈가 울버린을 중심에 세우고 나머지를 능력 위주로 압축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애초에 모든 구성원을 골고루 보여주는 것을 전제로 설계된 캐스팅이라 그 선택지가 없었고, 결국 열 명에게 같은 분량의 서사와 갈등과 액션을 배분하는 길을 갔습니다. 저는 이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과제였다고 봅니다. 히치콕과 큐브릭이 함께 달려들어도 두 시간 반 안에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다양한 인종의 히어로, 성소수자 히어로, 청각 장애를 가진 히어로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고 응원할 일이라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아쉬운 건 실행입니다. 이터널스는 창조주가 임무 수행을 위해 만든 안드로이드라는 설정인데, 그렇다면 한 명에게서 기본 감각인 청각을 빼고 설계했다는 설정과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성 연인의 애정 장면은 넣으면서, 누가 봐도 오랜 연인인 길가메시와 테나의 애정 표현은 끝내 비워둔 채 한쪽의 희생으로만 소비한 이중잣대도 남습니다. 표방한 가치를 실행이 따라가지 못하면 의도는 힘을 잃습니다. 덧붙여 극 중 히로시마 관련 대사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관객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것도 기록해 둡니다.
요약: 초면인 열 명에게 균등 분량을 배분한 설계 자체가 불가능한 과제였고, 다양성이라는 좋은 의도조차 실행의 모순들 때문에 힘을 잃었습니다.
클로이 자오 연출 논란: 노매드랜드 화법과 히어로 장르의 미스매치
전시 3관, 이 영화의 모든 단점이 출발하는 방입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의 전작 노매드랜드는 정착을 거부하고 길 위의 삶을 택한 사람들을 정적인 연출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수작입니다. 광활한 자연 속의 한 점으로 인간을 담는 와이드 앵글 화법은 그 영화에서 더없이 적절했습니다. 주인공은 거대한 자연에 파묻혀 자신을 찾아가는 인물이었으니까요. 레버넌트에서도 같은 화법이 통했습니다. 인간의 복수조차 자연의 순리 속 한 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의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터널스는 다릅니다. 이들은 인류의 시작부터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인류를 지켜온 신적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대단하고 멋진 존재로 그려져야 마땅한데, 영화는 능력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줘야 할 시간에 이 수호신들을 풍광 속에 던져놓고 와이드 앵글로 잡습니다. 히어로 영화의 제1원칙은 히어로가 멋지고 강력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어로들의 얄팍함을 해부하는 것이 주제였던 왓치맨조차 그 원칙만은 지켰습니다. 멋지고 나서 고뇌를 하든 갈등을 하든 해야 하는데, 이 영화의 히어로들은 멋져 보일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합니다.
비교 전시를 해보겠습니다. 슈퍼맨이 대기를 찢으며 날아오르는 장면 옆에 이카리스의 이륙 장면을 걸어두면, 같은 능력이 연출에 따라 얼마나 다른 무게를 갖는지 보입니다. 어벤져스가 시리즈의 상징이 된 그 원형 대열 숏을 얻기까지 들인 고민 옆에, 이터널스의 밋밋한 쐐기꼴 도열을 걸어두면 성의의 차이가 보입니다. 기존 히어로 영화와 달라서 새로웠다는 반론도 있는데, 저는 절반만 동의합니다. 개성을 살리는 것과 장르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은 다르고, 관객 대다수가 마블 영화에 기대하는 것을 비켜 가면서까지 관철한 개성은 연출이라기보다 자의식 과잉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정하게 인정할 것들도 전시해 둡니다. 마카리의 초고속 액션 장면들은 기존 스피드스터의 답습이긴 해도 나쁘지 않았고, 이카리스에게도 가뭄에 콩 나듯 멋진 장면이 있으며, 세르시의 능력과 화면의 미감은 이 영화만의 자산입니다. 자오 감독의 화법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이 장르·이 물량과 만난 조합이 틀렸다는 것이 저의 최종 진단입니다.
요약: 노매드랜드에서 옳았던 화법이 수호신들의 서사와 만나 미스매치를 일으켰고, "멋져 보일 것"이라는 장르의 제1원칙이 무너진 것이 혹평의 뿌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터널스가 왜 이렇게 혹평을 받았나요?
A.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처음 등장하는 열 명의 히어로에게 균등한 분량을 배분하려다 누구의 서사도 제대로 쌓이지 못했습니다. 둘째, 클로이 자오 감독의 정적이고 회화적인 화법이 히어로 장르의 기대와 어긋났습니다. 화면은 아름답지만 히어로들이 멋지고 강력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평단과 관객 혹평의 공통분모였습니다.
Q. 클로이 자오 감독이 어떤 사람인가요?
A.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감독입니다. 자연광과 실제 인물들을 활용한 정적이고 사실적인 연출이 특기로, 테렌스 맬릭 등의 영향을 받은 회화적인 화면을 만듭니다. 그 개성이 인디 영화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이터널스에서는 장르와의 궁합 문제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Q. 이터널스에서 마동석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요?
A. 길가메시 역의 마동석은 열 명 중 한 명으로서의 분량을 가져가며, 특유의 친근한 매력과 괴력 액션을 보여줍니다. 다만 테나와의 오랜 관계가 애정 표현 없이 한쪽의 희생 서사로만 소비되는 점은 국내외에서 공통적으로 아쉽다는 평가를 받은 부분입니다.
Q. 이터널스 쿠키 영상은 있나요?
A. 두 개 있습니다. 중간 쿠키에서는 새로운 우주적 캐릭터가 등장해 남은 이터널스와 접선하고, 마지막 쿠키에서는 데인 휘트먼이 의미심장한 물건을 마주하는 장면과 함께 후속 전개를 암시하는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시리즈 확장의 떡밥들이라 마블 팬이라면 챙겨볼 가치가 있습니다.
결론
도슨트 투어를 마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2점입니다. 아름다운 풍경화들과 열 점의 낯익은 초상화, 그리고 성의 없는 단체 사진 한 점. 이 전시의 문제는 그림 실력이 아니라 전시 기획이었습니다. 좋은 화가에게 맞지 않는 주제를 맡기고, 한 전시실에 너무 많은 주인공을 걸어둔 것.
의도는 능력이 받쳐줄 때 의미를 갖습니다. 다양성이라는 좋은 의도도, 감독의 개성이라는 좋은 재료도, 그것을 장르의 기대와 조화시키는 능력이 없으면 관객에게 닿지 못한다는 것. 이터널스가 남긴 가장 확실한 교훈입니다. 화면의 미감이 신선했다는 반론도 존중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마블 입문자에게도 팬에게도 선뜻 권하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