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부터 하나 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던 청년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 적이 있습니다. 위협적인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다르다는 이유로 시선을 돌렸던 그 몇 초를, 저는 영화 증인을 보는 내내 떠올렸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변론이 정확히 그 몇 초를 겨냥하거든요. 정우성과 김향기가 나오는 법정 드라마이고 결말과 반전까지 담은 리뷰이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5점입니다.
증인 영화 리뷰: 증인석에 선 소녀
이야기는 한 사망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홀로 살던 노인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고 가사도우미 오미란(염혜란)이 살인 혐의로 기소됩니다. 미란은 노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라 주장하고, 검찰의 유일한 증거는 옆집에서 그 밤을 목격한 여고생 임지우(김향기)의 증언뿐. 그런데 지우는 자폐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증인의 의사소통 특성을 이유로 그 증언의 증명력을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선고하죠. 영화의 오프닝이 이 장면입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변호인석의 남자가 주인공 양순호(정우성)입니다. 민변 출신의 가난한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파산한 아버지와 현실의 무게에 떠밀려 대형 로펌으로 적을 옮겼고, 로펌이 이미지 세탁용으로 맡은 이 무료 변론은 그의 승진과 직결된 시험대입니다. 2심을 준비하며 순호는 증인 지우에게 접근합니다. 처음엔 전략이었죠. 지우의 증언이 법정에서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지 보여주면 의뢰인의 무죄는 굳어지니까. 그런데 다섯 시 정각의 약속들, 퀴즈를 주고받는 하굣길, 조금씩 열리는 지우의 세계 앞에서 전략은 자꾸 사람의 일이 되어갑니다.
힘들어서 안 된다는 엄마의 만류에 지우가 답하는 장면에서 저는 처음 울었습니다. 그래도 증인이 되고 싶어. 나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알아. 그렇지만 나는 아마 변호사는 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증인은 될 수 있지 않을까 — 증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진실이 뭔지 알려주고 싶어. 그렇게 소녀는 자신을 의심하는 법정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갑니다.
좋은 사람입니까: 질문 하나가 재판하는 것
이 영화의 심장은 지우가 순호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를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라고 답한 소녀가 거꾸로 묻죠.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 전체가 그 한 문장에 대한 순호의 대답입니다. 재판의 판은 무죄 쪽으로 기울고 — 미란의 딱한 사연과 고인의 미담이 여론을 데우고 — 순호의 로펌은 확인 사살을 원합니다. 지우를 다시 증인석에 세워 그 증언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만천하에 보여주라는 것.
그리고 2심 법정 시퀀스, 한국 법정영화의 명장면 목록에 올려야 할 대목이 옵니다. 상대측은 예상대로 지우의 자격을 문제 삼습니다. 자폐인은 감정과 기억을 정확히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오래된 문헌을 들이밀며 증인 부적격을 주장하죠. 그때 순호가 준비한 것은 웅변이 아니라 실험입니다. 손수건의 물방울 무늬가 몇 개인지 — 196개 — 를 세어 보이게 하고, 법정 문 앞 보안관리대원이 속삭인 소속과 이름을 방청석 너머에서 정확히 알아맞히게 하고, 일부 자폐인의 극도로 예민한 청력에 관한 연구를 제시한 뒤 결정적 질문을 던집니다. 사건의 밤, 미란 씨가 했던 말은 몇 글자였죠. 백여덟 글자입니다. 그럼 그 말을 그대로 들려주시겠습니까.
소리를 사진처럼 저장하는 이 소녀의 기억 속에서 그 밤의 문장들이 재생되는 순간, 법정이 뒤집힙니다. 그 문장들은 다정한 간병인의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이어지는 순호의 최후 변론이 이 영화의 주제문입니다. 재판에 혼선이 있었던 건 지우의 증언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우의 소통 방식을 몰랐기 때문에,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편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우는 저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이 법정에서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피고인이 아니라 방청석 — 그러니까 우리의 시선입니다. 그게 이 영화의 설계입니다.
결말 해석: 자백, 체포, 그리고 노력해볼게요
결말입니다. 자신의 의뢰인에게 불리해질 것을 알면서 진실의 편에 선 순호의 변론 앞에 미란은 눈물의 자백을 내려놓고, 사건의 배후 — 유산을 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한 아들 — 가 법정에서 체포되며 이야기는 정의의 자리를 찾습니다. 순호는 로펌의 사다리에서 스스로 내려오고요. 에필로그의 지우는 특수학교로 옮겨 웃으며 말합니다. 정상인 척 안 해도 되니까 좋아요. 그리고 마지막 인사.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지우의 말에 순호가 답하죠.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볼게요. 좋은 사람이란 완성형이 아니라 노력의 방향이라는 것 — 이 영화의 대답입니다.
미덕을 셋으로 정리합니다. 첫째, 김향기. 쉽지 않은 역할을 과장이나 동정 유발 없이 한 사람의 고유한 세계로 연기해냅니다. 저 에필로그의 대사는 이 배우의 톤 조절이 아니었으면 설교가 됐을 문장이에요. 둘째, 정우성. 액션과 카리스마의 배우가 흔들리는 보통 사람의 얼굴로 두 시간을 지탱하고, 그 절제가 백상예술대상 대상이라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셋째, 시선의 윤리. 이 영화는 자폐를 신비화하지도 — 지우의 능력은 초능력이 아니라 특성으로 제시됩니다 — 대상화하지도 않으려 애씁니다. 지우는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러 제 발로 법정에 선 주체이고, 제목이 증인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아쉬움도 적자면 악역 구도가 다소 평면적이고 후반의 감동 설계가 정직하게 예상 가능하다는 것. 다만 이 영화의 목표가 장르적 반전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을 재판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 정직함은 흠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깝습니다. 점수는 7.5점입니다.
덧붙이는 셋
Q. 증인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특정 실화의 영화화는 아니고 문지원 작가의 창작 각본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작가의 다음 행보인데, 훗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쓴 바로 그 작가입니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를 법정의 주체로 세운다는 문제의식이 증인의 지우에서 우영우로 이어진 셈이라, 두 작품을 나란히 보면 계보가 보입니다.
Q. 미란은 결국 왜 그런 선택을 한 건가요? (스포일러)
A. 아픈 아들의 수술비라는 절박함을 파고든 배후가 있었습니다. 유산을 노린 고인의 아들이 미란의 사정을 이용해 범행을 사주했고, 사건을 극단적 선택으로 위장한 것이죠. 딱한 가해자와 진짜 설계자를 분리해 보여주는 이 구조 덕에, 영화는 단순한 권선징악 이상의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Q. 아이들과 함께 봐도 되나요?
A. 12세 이상 관람가로, 자극적인 장면 없이 대화와 감정으로 굴러가는 영화라 가족 관람에 알맞습니다. 오히려 다름을 대하는 시선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 나누기 좋은 교재형 영화라, 관람 후 지우의 마지막 대사를 두고 대화해 보시길 권합니다.
몇 초의 숙제
지하철에서 자리를 옮겼던 저의 그 몇 초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때 제게 없었던 건 선의가 아니라, 알려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이 영화의 표현을 빌리면 — 보고 싶은 것만 보려던 눈이요.
그러니 이 영화가 내준 숙제를 이렇게 받아 적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볼게요. 완성은 못 하더라도 방향은 가질 수 있으니까. 다음에 그 청년을 다시 만난다면, 적어도 자리를 옮기지는 않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