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따라갔던 시골 장례식장의 풍경을 기억합니다. 마을 어른들이 다 모여 앉아 육개장에 막걸리 잔을 돌리고, 슬픔과 안부와 동네 소문이 한 상에서 오가던 자리. 결백은 그 익숙한 풍경을 스릴러의 무대로 바꿔버리는 영화입니다. 조문객들이 돌려 마신 막걸리 잔에서 사건이 시작되니까요. 신혜선, 배종옥, 허준호의 법정 스릴러이고, 이 글은 결말과 진범의 정체까지 담고 있으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입니다.
결백 영화 리뷰: 한 상에서 시작된 사건
대천시의 유지 안태수의 장례식. 현직 시장 추인회(허준호)를 비롯한 마을 어른들이 모여 곧 유치될 카지노 이야기로 들떠 있던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신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집니다. 술에 농약이 섞여 있었던 것. 다섯 명이 중태에 빠진 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경찰은 고인의 아내, 치매를 앓는 엄마 화자(배종옥)를 지목합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그 뉴스에 서울 대형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정인(신혜선)이 고향으로 내려옵니다. 그녀가 부모와 연을 끊고 살아온 이유는 아버지의 폭력이었고, 홀로 상경해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죠. 오랜만에 마주한 엄마는 그러나 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극심한 충격으로 인한 급성 치매. 대소변도 가리기 어려운 상태의 엄마가 계획 범죄의 피의자라니. 정인이 직접 변호를 맡으면서 영화는 법정 스릴러의 옷을 입습니다.
초장부터 수상합니다. 담당 형사가 하필 피해자의 아들이고, 지장만 찍으면 보내준다는 강압 수사로 조서가 만들어졌으며, 증거 사진 속 농약병은 경찰 편의대로 위치가 옮겨져 있습니다. 목격자라는 사람은 진술 시간에 현장 CCTV 어디에도 없죠. 정인이 법정에서 검사, 형사, 증인이 전부 피해자의 자녀이거나 동창이라는 유착을 폭로하며 판을 뒤집는 초반 시퀀스는, 이 영화가 왜 사이다라 불렸는지 보여주는 예고편입니다. 그런데 파면 팔수록 사건의 뿌리가 깊습니다. 시장 추인회는 카지노 승인을 대가로 뒷돈을 받아온 인물이고, 엄마 집에 사람을 보내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쫓다 보면 아버지 안태수의 땅이 나옵니다. 병원비가 급해 헐값에 넘긴 땅이 매각 직후 그린벨트가 풀리고 카지노 부지가 되며 폭등한 것. 금광 소문을 낸 지질학자부터 폭리를 취한 명의까지 전부 시장의 처가 사람들이었습니다.
농약 막걸리의 범인 찾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땅과 카지노와 수십 년 묵은 원한의 지도로 넓어집니다. 그리고 그 지도의 한가운데에 이 가족의 가장 오래된 비밀이 묻혀 있습니다.
결말 해석: 무죄와 결백은 같은 말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결말의 진실입니다. 엄마의 첫 남편 — 정인의 친아버지 — 의 죽음에 태수와 추인회 패거리가 얽혀 있었습니다. 엄마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정인을 가진 것을 알면서도 혼인을 종용한 태수와 반평생을 살아온 것이었죠. 뒤늦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엄마가 선택한 것은 법이 아니었습니다. 태수를 농약으로 처단했고, 장례식의 막걸리로 나머지 패거리까지 단죄하려 했습니다. 급성 치매를 부른 극심한 충격의 정체가 이렇게 밝혀집니다.
정인의 선택도 법전 밖에 있습니다. 법정에서 그녀는 시장의 카지노 비리 — 처가 명의의 폭리 — 를 폭로해 그를 파멸시키고, 이미 세상을 떠난 태수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며, 엄마가 계획 범죄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임을 입증해 무죄를 받아냅니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동생 정수의 증언 장면 — 장애인 증인의 판례를 들어 재판부를 설득하는 대목 — 은 이 법정극에서 가장 조용히 뭉클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스스로에게 칼끝을 돌립니다. 어머니가 정말 결백하다고 생각하세요? 정인의 답은 이렇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어요. 제목의 결백은 그러니까 무죄 판결의 결백이 아닙니다. 법이 지켜주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단죄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죠. 영화는 사이다의 통쾌함으로 달리다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춰 서는데, 저는 그 멈춤이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수극의 쾌감과 법의 원칙 사이에서, 판결을 관객에게 넘기는 것. 통쾌하게 웃고 나온 뒤에도 뒷맛이 오래 남는 이유입니다.
볼만한가: 배우가 벌고 각본이 쓴 영화
이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이 벌어온 쪽입니다. 배종옥은 치매의 안개와 어미의 한을 한 몸에 담아 이 영화의 심장을 맡고, 신혜선은 첫 스크린 주연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밀도로 법정을 장악합니다. 드라마에서 증명된 발성과 감정 폭이 큰 화면에서도 그대로 통한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죠. 허준호는 지역 유지의 능글맞은 위압을 체온처럼 두르고, 정수 역의 홍경은 짧은 분량으로도 또렷한 인상을 남깁니다.
반면 각본은 배우를 못 따라갑니다. 반전을 위해 숨겨둔 정보가 후반에 몰아서 풀리며 설명이 급해지고, 수사와 재판 절차의 헐거움은 법정물로서는 아쉬우며, 마을 사람들의 묘사도 다소 평면적입니다. 사이다의 탄산이 강한 만큼 뒷맛의 개연성은 옅은 편이에요. 초반의 유착 폭로처럼 짜릿한 대목과, 급하게 봉합되는 대목이 한 영화 안에 공존합니다.
점수는 6점. 잘 짜인 법정물을 기대하면 아쉽고, 배우들의 얼굴과 마지막 질문의 여운을 위해서라면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모녀 서사에 약한 분이라면 후반부에 손수건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도 적어둡니다.
남은 질문 셋
Q. 결백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특정 실화의 영화화는 아닌 창작 시나리오입니다. 다만 지역 개발을 둘러싼 유착이나 힘없는 사람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상황처럼 현실에서 낯설지 않은 결들을 재료로 삼고 있어서, 허구인데도 어딘가 있을 법한 이야기로 다가오는 유형입니다.
Q. 결국 범인은 누구인가요? (스포일러)
A. 장례식 사건의 장본인은 엄마 화자가 맞습니다. 다만 그 행위는 첫 남편의 죽음과 반평생의 기만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 뒤의 단죄였고, 법정은 계획 범죄가 불가능한 상태를 근거로 무죄를 선고합니다. 법의 무죄와 마음의 결백 사이의 간극 — 그게 이 영화가 제목으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Q. 결백, 많이 무겁거나 잔인한가요?
A. 15세 이상 관람가로, 잔혹한 장면을 전시하는 유형은 아닙니다. 다만 가정 내 폭력과 가족의 아픈 진실이 서사의 뿌리라 정서적으로는 묵직한 편이고, 법정 공방의 통쾌함과 모녀의 눈물이 번갈아 오는 구성이라 스릴러와 신파 사이의 온도로 보시면 맞습니다.
잔을 내려놓으며
영화가 끝나고 저는 그 시골 장례식장의 막걸리 상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한 상에 둘러앉는다는 건 서로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래 서늘한 이유는 원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원한이 수십 년 동안 같은 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결백은 완벽한 법정물은 아니지만, 무죄와 결백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질문 하나는 정확하게 남기는 영화입니다. 배종옥과 신혜선의 얼굴로 그 질문을 받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두 시간의 값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