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자전거를 도둑맞고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못 찾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 거죠. 그러니까 제 자전거는 이 세상 어느 통계에도 잡히지 않은 도난 사건입니다. 암수살인이라는 낯선 제목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암수범죄 — 실제로 일어났지만 신고되지 않거나 인지되지 못해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범죄. 자전거라면 씁쓸하고 말 일이지만 그것이 사람의 목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김윤석, 주지훈의 이 실화 모티브 수사극을 결말까지 담아 정리합니다. 실존 피해자들이 계신 사건이 바탕인 만큼 이 글은 절제된 서술로 쓰려 합니다. 스포일러에 유의하시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
암수살인 리뷰: 교도소에서 걸려온 전화
시작은 한 통의 전화입니다. 부산의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교도소에서 걸려온 전화 — 살인 사건을 제보하겠다는 수감자 강태오(주지훈)를 찾아간 자리에서,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막힌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지금 재판받는 건 말고도 더 있다는 것. 종이에 적어 내려간 일곱 건의 목록, 그리고 그 정보의 값으로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뻔뻔함까지(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영치금을 넣어주며 거래를 시작한 김 형사는 강태오가 불러준 장소에서 실제 증거를 찾아내며 소름이 돋습니다. 거짓이 아니었던 것. 그런데 첫 번째 함정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하필 진행 중이던 재판에서 강태오에게 유리하게 작용해버린 것 — 형사가 살인범의 감형을 도와준 꼴이 된 겁니다. 동료들의 시선은 싸늘해집니다. 그래도 김 형사가 혼자서라도 이 목록을 수사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목록이 사실이라면, 저 바깥에 가족이 사라진 줄도 모른 채 — 혹은 알아도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 채 —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수사는 뒤통수의 연속입니다. 강태오가 죽였다고 진술서에 쓴 피해자를 찾아갔더니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이코패스의 장난이었던 것. 그래도 다음 정보를 쫓은 끝에 야산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이 발견되고 실종자 대조로 새 수사가 열리자 — 강태오가 돌변합니다. 피의자 신분이 되는 순간 자백을 통째로 번복하고, 결정적 감식 결과는 그의 진술과 어긋나는 것으로 판명 나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다. 진실에 거짓을 교묘히 섞어 혼선을 주는 것까지가 그의 놀이였다는 것을.
실화 총정리: 좌천, 입증, 그리고 남은 목록
김 형사는 판을 다시 짭니다. 말이 바뀔 것에 대비해 접견을 녹화하고,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진술 더미에서 교차 검증으로 알짜만 추려내는 것 — 그러나 증거 부족으로 한 사건은 기소 중지되고, 강태오의 페이스에 말렸다는 평가 속에 김 형사는 좌천까지 당합니다. 그래도 수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취를 감춘 동거녀의 흔적, 어쩌면 첫 범행이 제 아버지였을지 모른다는 서늘한 가능성 — 조각들이 맞춰지며 범행의 동기도 윤곽을 드러냅니다. 바깥에서 겪은 수모에 분노를 쌓다 가장 약한 상대에게 터뜨리는 비겁한 폭력의 패턴. 영화는 이 재구성조차 자극적인 회상 대신 절제된 화면으로 처리하는데, 저는 이것이 실존 피해자들에 대한 이 영화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끈질긴 검증 끝에 김 형사는 마침내 한 건의 살인을 입증해내고, 강태오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승리의 팡파르로 끝나지 않습니다. 목록에는 아직 밝혀지지 못한 죽음들이 남아 있고 —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어도,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억울한 사건들이기에 그는 멈출 수 없다는 것. 혼자서 묵묵히 이어가는 고독한 수사를 비추며 영화는 닫힙니다.
방송의 실화 해설이 이 묵직함에 무게를 더합니다. 실제로 수감 중이던 한 살인범이 옛날에 알던 형사에게 편지를 보내 알려지지 않은 살인 목록을 밝히면서 시작된 사건이라는 것 — 영화처럼 그중 입증된 것은 한 건이었고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며, 그는 이후 수감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록의 상당수가 미제로 남았다는 뜻이죠. 더 기막힌 것은 그 수사를 해낸 실존 형사가 포상이 아니라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 — 살인범의 말을 믿고 수사를 벌였다는 이유였습니다. 세상이 세지 않는 숫자를 세겠다던 사람이 치른 값입니다.
입증된 것은 한 건, 남은 것은 목록 — 이 영화의 엔딩이 승리가 아니라 묵념인 이유입니다.
암수살인 뜻: 세어지지 않는 죽음을 세는 일
방송에 출연한 프로파일러의 해설이 이 영화의 심리전을 정리해 줍니다. 극 중 강태오가 심리 감정에서 '감정 불가' 판정을 받는 이유 — 머리가 비상해서가 아니라, 솔직한 진술을 전제로 하는 감정 절차 자체를 밥 먹듯 하는 진술 번복으로 무력화시키는 유형이기 때문이라는 것. 형사를 가지고 놀며 영치금과 바깥 구경(현장 검증)과 즐길 거리를 뜯어내는 것이 목적이고, 목록을 부풀리는 것도 상대를 계속 매달리게 만들려는 설계라는 분석입니다. 그 말더미 앞에서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실존 형사가 겪었을 고뇌는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배우 이야기도 적어야죠. 주지훈의 캐스팅은 감독의 오랜 구애였는데 시나리오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수락했다는 후문 — 악역을 향한 배우의 열망에 부산 사투리와 수갑 찬 손의 디테일까지 벼린 열연으로 응답했습니다. 신과함께의 차사, 공작의 보위부 요원에 이은 이 배우의 스펙트럼이 새삼스럽고, 김윤석은 형사물의 가죽 재킷 대신 수수한 차림으로 집념이라는 단어를 두 시간 동안 체화합니다. 추격전도 반전 쇼도 없이 접견실의 말싸움만으로 긴장을 끌고 가는 한국 범죄 실화극의 드문 품격 — 점수는 7점입니다.
다만 이 영화에는 기억해야 할 그림자가 하나 있습니다. 개봉 과정에서 불거진 유족 관련 논란 — 실화를 다루는 영화가 피해자 곁에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의 숙제를 남긴 일이고, 아래 문답에서 정리합니다.
남겨둘 물음 둘
Q. 어디까지가 실화인가요?
A. 뼈대가 실화입니다. 수감 중이던 살인범이 형사에게 편지로 추가 살인 목록을 밝힌 것, 형사가 홀로 그 목록을 수사한 것, 그중 한 건을 입증해 무기징역을 끌어낸 것, 그리고 그 형사가 징계를 받은 것까지 — 모두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인물의 이름과 세부 사건들에는 각색이 있지만, '밝혀지지 못한 죽음을 쫓은 형사'라는 중심은 기록 그대로입니다. 영화를 보신 뒤 암수범죄라는 개념 자체를 찾아 읽어보시면, 이 영화가 왜 만들어졌는지가 더 선명해집니다.
Q. 개봉 당시 유족 논란은 무엇이었나요?
A. 극 중 한 사건이 실제 피해자의 사건과 흡사하게 그려졌는데, 유족 측이 사전 동의나 충분한 설명을 받지 못했다며 개봉 전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작진은 공식 사과했고 유족 측과의 협의 끝에 영화는 개봉됐죠. 피해자들을 기리는 취지의 영화가 정작 한 유족에게 상처를 줬다는 아이러니 — 실화 영화의 윤리가 작품의 완성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함께 기억되어야 할 대목입니다.
세어지지 않은 숫자들에게
그 자전거를 다시 생각합니다. 신고하지 않은 도난, 세어지지 않은 숫자 — 세상의 통계는 늘 실제보다 작습니다. 그 간극에 사람의 억울함이 묻혀 있다면, 누군가는 그 숫자를 끝까지 세어야겠죠.
암수살인은 그 '세는 사람'에 대한 영화이고, 끝내 밝혀지지 못한 이름들에 대한 조용한 묵념입니다. 영화가 끝나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을 그 셈을 생각하며 — 미제로 남은 사건들의 피해자분들과 유가족분들께, 이 글의 마지막 줄을 빌려 위로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