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팬으로 산다는 건 오래 사귄 연인에게 반복적으로 서운해지는 일과 비슷합니다. 다크나이트의 기억으로 버티다가 개봉일마다 극장에 달려가고, 나오면서 변명거리를 찾는 것. 그래서 아쿠아맨은 아예 기대를 접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극장에 앉아 내내 든 생각은 하나였어요. 아니, DC가… DC 영화가 이럴 리가 없는데. 제임스 완 감독, 제이슨 모모아 주연의 이 물속 히어로물에 대한 반전 호평 리뷰이고, 줄거리 언급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5점입니다.
아쿠아맨 리뷰: 기대를 접자 바다가 열렸다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됩니다. 육지에서 히어로 노릇을 하던 혼혈 왕자 아서(제이슨 모모아)가, 인간과의 전쟁을 선언한 아틀란티스의 왕이자 이복동생 옴(패트릭 윌슨)을 막기 위해 전설의 삼지창을 찾아 메라(앰버 허드)와 여행을 떠난다는 것(출처: IMDb — Aquaman). 히어로 탄생기이자 모험담이자 왕이 되어가는 성장담 — 노가다로 경험치를 쌓다가 전설템을 먹고 만렙을 찍는, 게임과 전래동화의 유서 깊은 패턴이죠. 킹 아서의 엑스칼리버가 그랬고, 인피니티 워의 토르가 스톰브레이커를 얻는 과정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야기 자체는 단순합니다. 단조롭다는 평가도 있고 그 지적은 맞아요.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에는 우직함이라는 힘이 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곁길로 새지 않고 정공법으로 밀어붙이는데, 그 과정의 장면 하나하나가 흥미로워서 지루할 틈이 없는 겁니다.
그 과정을 떠받치는 것이 비주얼입니다. 슈퍼히어로 영화 중에 이야기의 대부분을 바닷속에서 진행한 작품은 사실상 없었죠. 아쿠아맨은 그 미개척지를 통째로 관광시켜주는 영화입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른 일곱 바다 왕국의 풍경, 빛이 닿지 않는 심해의 어둠, 그리고 고래와 해마와 상어들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전투와 이동의 수단으로 굴러가는 연출까지. 고백하자면 개봉 전 포스터 — 아쿠아맨 뒤에 바다 생물들이 쫙 깔린 그 그림 — 를 보며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본편을 보고 나오면 압니다. 하나도 안 유치합니다. 해마를 타고 달리는 왕자가, 오히려 멋있습니다.
재밌는 이유: 삼지창의 재발견과 트렌치의 공포
이 영화의 진짜 지분은 액션입니다. 아서와 오션 마스터의 결투도 좋지만 백미는 삼지창이라는 무기의 재발견이에요. 찌르고 휘두르고 던지고 회수하는 동작과 기술이 합마다 새로워서, 다음 합은 뭘까를 기대하며 보게 되는 액션 — 무기 하나를 두고 이만큼 고민한 티가 나는 히어로물은 드뭅니다. 시칠리아 지붕 위의 추격전은 경쾌하고, 최종장의 심해 대전쟁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수만의 군세와 괴수들이 뒤엉키는 그 스케일은, 심해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딱 이런 그림이겠구나 싶은 화려함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임스 완이라는 이름값이 뜻밖의 자리에서 터집니다. 쏘우로 데뷔해 컨저링과 인시디어스, 애나벨까지 공포로 잔뼈가 굵은 이 감독은 영화 중반, 괴생명체들이 사는 트렌치 해역 시퀀스에서 특기를 유감없이 꺼냅니다. 칠흑의 바다로 가라앉는 두 사람에게 괴물 떼가 몰려드는 그 장면은 히어로 영화에 이식된 정통 호러라, 극장에서 진심으로 오싹했습니다. 분노의 질주 더 세븐으로 블록버스터 흥행력까지 입증한 감독이 히어로물마저 첫 시도에 해내는 것을 보면 — 장르를 가리지 않는 능력자라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단순한 이야기 + 압도적 비주얼 +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 — 아쿠아맨의 재미는 새로움이 아니라 기본기를 스케일로 밀어붙인 데서 나옵니다.
쿠키 영상 있나: 관람 팁과 아쉬움, 그리고 흥행
먼저 많이들 검색하는 쿠키 정보부터 정확히 적습니다. 원본 리뷰어는 쿠키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착오로, 아쿠아맨에는 크레딧 중간에 속편의 빌런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크레딧 음악도 좋으니 조금만 더 앉아 계시길. 관람 포맷 팁도 확실합니다. 촬영의 90퍼센트가 아이맥스 포맷으로 이뤄진 영화라 화면이 클수록 이득이고, 리뷰어도 스크린X 관람 후 아이맥스 2회차를 예고했을 정도입니다.
아쉬움도 공정하게 적습니다. 그 전설의 삼지창을 얻는 최종 관문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려 허무하고 — 목숨 건 대장정 끝의 보스전이 스피드런으로 끝나는 격 — 왕좌를 거부하던 아서가 마음을 바꾸는 계기도 다소 얇습니다. 유머의 타율이 낮아 개그 장면들이 종종 겉도는데, 공포의 장인이 코미디에는 약할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귀여운 약점이죠. 빤딱거리는 유선형 수트와 대왕 파리 같은 빌런 헬멧 등 코스튬 취향도 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총평은 명확합니다. 앵간한 건 다 좋다. 흥행도 그랬습니다. 제작비 1억 7천만 달러를 개봉 초반에 회수하더니 최종적으로 전 세계 11억 달러대, DC 확장 유니버스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고, DC 좋아하는 사람 찾기는 심해에서 바늘 찾기라던 한국에서도 입소문을 타며 500만을 넘겼습니다. 속고 또 속아 돌아섰던 관객들이 이 영화로 조금은 돌아온 겁니다. 점수는 7.5점. 겨울에 보면 바닷속 장면들 때문에 두 배로 춥다는 리뷰어의 하소연에는 웃음이 났지만, 덕분에 저는 이 영화를 여름마다 다시 트는 납량 겸 피서용 단골로 삼게 됐습니다.
덧붙이는 셋
Q. 저스티스 리그를 안 봤는데 아쿠아맨만 봐도 되나요?
A. 됩니다. 이 영화는 아서의 출생부터 시작하는 사실상의 단독 기원담이라, 이전 DC 영화들을 몰라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저스티스 리그를 봤다면 몇몇 대사가 더 재밌어지는 정도의 연결이라, DC 입문작으로도 손색없는 독립성입니다.
Q. 아이들과 함께 봐도 되나요?
A. 12세 이상 관람가로, 화려한 바다 왕국과 바다 생물들의 비주얼은 아이들이 특히 좋아할 요소입니다. 다만 중반의 트렌치 해역 시퀀스는 정통 호러의 문법이라 겁이 많은 어린이에게는 꽤 무서울 수 있으니, 그 대목만 미리 귀띔해 주시면 온 가족 관람에 무리가 없습니다.
Q. 속편도 나왔나요?
A. 네, 2023년 속편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개봉해 이 시리즈이자 기존 DC 확장 유니버스의 마무리 격 작품이 됐습니다. 1편의 쿠키가 예고한 빌런의 복수극이 본격화되는 이야기라, 1편 크레딧 중간의 그 장면을 기억해 두고 보시면 연결이 깔끔합니다.
연애를 연장하며
기대를 접고 들어가 두 손 가득 얻어 나온 극장의 행복이 있습니다. 아쿠아맨이 제게 그런 영화였습니다. 서운함이 쌓이던 오랜 연애에 도착한 뜻밖의 꽃다발 같은 것 — DC 팬의 연애는 이렇게 또 한 번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니 저처럼 DC에 데인 기억으로 이 영화를 건너뛰셨던 분이라면, 기대는 접은 채로 한 번 입수해 보시길. 물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해마는 생각보다 멋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