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동네 바둑교실을 석 달 다니고 그만뒀습니다. 원장 선생님의 한마디 때문이었죠. 너는 수읽기가 안 되는구나.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은 오래 남아서, 신의 한 수 귀수편의 소년이 같은 말을 듣는 장면에서 옛 상처가 덧났습니다. 기재가 전혀 없다 — 다만 이 영화의 소년은 저처럼 바둑판을 접는 대신, 그 말을 한 사람을 평생의 과녁으로 삼습니다. 권상우 주연의 바둑 액션 활극이고, 결말과 반전까지 담은 리뷰이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세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입니다.
신의 한 수 귀수편 리뷰: 기재가 없다던 아이
이야기는 1988년에서 시작합니다. 훗날 귀수라 불릴 소년은 프로기사 황덕용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잔심부름으로 연명하고, 하나뿐인 혈육인 누나 수연은 그 집의 청소일로 동생의 바둑 수업비를 대신합니다. 그런데 친절의 가면을 쓴 집주인의 민낯은 추악했습니다. 소년은 창문 너머로 누나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순간을 목격하고 말죠. 어린 귀수는 바둑으로 승부를 청하지만 상대의 집요한 압박과 충격 앞에 손이 멈추고, 돌아온 것은 기재가 없다는 모욕뿐. 얼마 뒤 누나마저 곁을 떠나며 소년은 혼자가 됩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무작정 서울로 향한 소년을 거둔 이는 기원에서 그를 눈여겨본 남자, 허일도(김희원)입니다. 세상은 놀이터가 되든가 지옥이 되든가 둘 중 하나이고 대부분은 지옥에서 끝난다는 이 냉소적인 사내의 훈련은 말 그대로 지옥입니다. 대국 한 판마다 돌멩이를 쌓는 돌탑, 5초 안에 기보를 통째로 외워 그리는 암기 훈련, 그리고 압권 — 어두운 창고에 갇혀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만 두는 대국. 이길 때까지 못 나오는 그 창고의 벽에는 소년이 손끝의 피로 그린 바둑판이 남습니다. 만화적 과장이지만, 바둑을 무공처럼 수련하는 이 그림들이야말로 이 시리즈만의 맛이죠.
그러나 스승과의 날들은 길지 않습니다. 큰 내기에서 이긴 날 밤 원한을 산 자들의 습격에 허일도는 목숨을 잃고 소년만 겨우 달아나죠.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귀수(권상우)는 스승의 유언 같은 말 — 혼자가 되면 관철동의 똥선생을 찾아라, 쓸모없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다 — 을 따라 입담 좋은 사기꾼 똥선생(김성균)과 콤비를 이루고, 복수의 여정에 시동을 겁니다.
결말 해석: 복수의 경유지들과 죽을 사(死) 자
여정의 경유지들이 이 영화의 볼거리입니다. 부산의 맹인 고수 장성 무당과의 대국은 가장 기이하고 서늘한 장면입니다. 흑백 구분이 없는 돌로 두는 대국, 고개를 들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무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과거의 진실 — 누나는 그 일 이후 스스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네 누나를 해친 그 악마를 죽이면 네 운명도 거기서 끝난다는 예언은 이 복수극에 숙명극의 그림자를 드리우죠. 지면 따블, 또 지면 따따블로 판을 키우는 악명의 꾼 부산잡초와의 재대결도 유쾌합니다. 건물 소유권까지 따낸 뒤 목숨을 걸겠다면 석 점을 깔아주겠다는 오만한 관용, 그리고 다음 날 은원을 잊고 잡초를 구해주는 의외의 의리까지.
또 다른 축은 외톨이(우도환)입니다. 특수한 바둑판에 상대를 앉혀 잔혹하게 제거하는 이 젊은 킬러의 정체는 어린 날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 아이 — 귀수의 과거와 거울처럼 마주 보는 존재죠. 강제로 시작된 돌 따내기 승부에서 귀수가 일부러 비김수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숨은 명장면입니다. 죽이는 수가 아니라 살리는 수. 복수의 화신이 소년 시절의 자신 같은 아이에게 건네는 유예입니다.
그리고 최종전. 귀수는 황덕용(허성태)에게 초대장을 보냅니다. 너 같은 놈 100명이 간다 — 프로 기사 백 명과의 연속 속기 대국이라는 만화 같은 설정. 아흔아홉을 연파하고 마주 앉은 원수 앞에서 치명적인 패착으로 무너지는 듯하던 귀수는, 어린 날 그를 얼어붙게 했던 것이 기세가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누나의 단추였다는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폭발합니다. 바둑판 위에 죽을 사(死) 자를 새기는 압도적 승리, 그리고 딸과 자신 중 하나를 고르라는 마지막 선택지 앞에서 황덕용은 제 목숨으로 값을 치릅니다. 통쾌하되, 사적 단죄의 뒷맛은 역시 서늘하게 남는 결말입니다.
귀신의 수를 쓰는 귀수 — 이름을 얻는 순간 복수는 끝나지만, 무당의 예언대로 그 운명이 어디서 멈출지는 여백으로 남습니다.
1편 안 봐도 되나: 바둑 영화가 아니라 바둑 활극
시리즈 관계부터 정리합니다. 귀수편은 정우성 주연 1편(2014)의 속편이 아니라 같은 세계관의 독립 스핀오프라, 1편을 안 봐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상으로는 앞선 이야기에 가까워서, 귀수편을 먼저 보고 1편으로 넘어가는 순서도 성립합니다. 두 편의 공통점은 바둑을 수담이 아니라 무협의 문법으로 다룬다는 것 하나죠.
이 영화의 미덕은 그 뻔뻔함입니다. 1편의 노선을 더 밀어붙여 수담이 오가야 할 자리에 주먹과 숙명과 귀신의 수가 오갑니다. 권상우의 몸은 이 황당한 설정을 물리적으로 설득하는 엔진이고 — 거꾸로 매달려 단련하는 오프닝부터가 선언입니다 — 김희원의 스승, 김성균의 능청, 허성태의 악역, 우도환의 서늘함까지 배역들의 합이 좋습니다. 약점도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바둑 자체의 리얼리티는 일찌감치 포기한 설계라 기력 있는 관객일수록 실소가 나고, 복수극의 궤도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며, 여성 인물은 비극의 장치로만 소비됩니다.
점수는 6점. 바둑 영화가 아니라 바둑 '활극'임을 받아들이고 입장하면 두 시간이 시원하게 흐르는 오락입니다. 스타일과 기세로 밀어붙이는 한국형 장르물의 쾌감이 필요한 밤에 맞는 처방이죠.
궁금한 두 가지
Q. 바둑을 전혀 몰라도 볼 수 있나요?
A. 전혀 문제없습니다. 대국의 승패는 인물들의 표정과 리액션, 연출의 리듬으로 전달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규칙을 몰라도 긴장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애초에 바둑의 리얼리티보다 승부의 드라마에 집중한 활극이라, 오히려 바둑을 잘 아는 분일수록 과장이 눈에 밟히는 역설의 영화입니다.
Q. 이런 내기 승부극이 좋았다면 이어 볼 작품은요?
A. 같은 해 나온 타짜: 원 아이드 잭이 정확한 짝입니다. 포커판의 심리전과 팀플레이를 다룬 작품이라 바둑판의 귀수편과 나란히 보면 '내기 승부극'의 두 문법이 비교되는 재미가 있고, 두 영화 모두 판의 화려함보다 수렁의 경고를 잊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 리뷰가 있으니 함께 읽어보세요.
복기를 마치며
극장을 나서며 그 물고기 풍경의 가르침을 곱씹었습니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 세상이나 바둑판이나 마음의 눈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스승의 말. 수읽기가 안 된다던 바둑교실의 저에게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재능이 아니라 그 눈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활극의 감상법도 타짜 리뷰 때와 같은 문장으로 닫겠습니다. 스크린 속의 판은 배우들의 기세로 즐기되, 현실의 내기는 백 원짜리까지만. 귀신의 수는 영화에만 있고, 우리의 바둑판에는 복기와 다음 한 수가 있으면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