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무렵, 학원을 빼먹고 터미널 전광판을 한참 올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주머니엔 만 원 남짓.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고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것 같던 그 기분을, 영화 시동의 택일이 매표소에 던지는 한마디가 정확히 소환하더군요. 만 원으로 갈 수 있는 데가 어디예요. 박정민, 마동석, 정해인의 웹툰 원작 코미디이고, 결말과 거석이형의 정체는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입니다.
시동 영화 리뷰: 만 원으로 갈 수 있는 곳
영화는 사고뭉치 이인방의 질주로 문을 엽니다. 오토바이 하나에 몸을 실은 열여덟 택일(박정민)과 상필(정해인). 폭주족에게 시비가 붙어 쫓아가다 돌아온 건 사고 하나와, 학원비로 오토바이를 샀다는 사실이 들통난 뒤 날아온 엄마(염정아)의 불꽃 싸대기입니다. 전직 배구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이 붙은 그 손맛에, 택일은 그길로 가출을 감행하죠(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만 원짜리 버스가 데려다준 곳은 군산. 터미널에서 빨간 머리 경주(최성은)와 시비인지 첫인사인지 모를 조우를 하고 — 보자마자 말을 못 잇는 하남자의 면모는 이 영화의 잔재미입니다 — 갈 곳 없이 헤매다 짜장면 3,000원이라는 수상한 가격표의 중국집, 장풍반점을 발견합니다. 숙식 제공이라는 조건에 홀려 취직한 그곳 주방에 이 영화의 심장이 서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살벌한 비주얼의 주방장, 거석이형(마동석).
열여덟이라는 택일에게 돌아오는 첫 대화부터 명품입니다. 고1 자퇴요. 존댓말 배우기 전에 자퇴했네. 배울 게 없어서요. 그럼 넌 천재냐. 이 티키타카로 시작된 불편한 동거는 꿀밤과 등짝, 아침부터 전단지를 날리며 노는 주방 식구들의 등쌀 속에서 이상한 온기를 만들어갑니다. 택일은 배달부로 자리를 잡고, 첫 월급을 타고, 사장님과 식구들에게 한턱을 쏘며 조금씩 그 생활에 정이 듭니다.
집을 나온 열여덟에게 숙식과 꿀밤과 첫 월급을 주는 수상한 중국집 — 시동의 절반은 이 장풍반점의 온기로 굴러갑니다. 나머지 절반은 그 온기 밖의 그늘이고요.
마동석 거석이형: 단발머리 주방장의 말 못할 사정
이 영화의 캐스팅은 팬들이 먼저 했습니다. 조금산 작가의 원작 웹툰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에 거석이형은 마동석이 해야 한다는 말이 진작부터 나왔고, 뚜껑을 열어보니 그 단발머리 비주얼 쇼크와 함께 찰떡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싱크로율이 나왔죠. 재미있는 건 이 캐릭터의 설계입니다. 싸움이라면 한 손으로 끝낼 것 같은 덩치가, 시비가 붙을 때마다 기가 막히게 상황을 피해 도망칩니다. 센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대단하시다는 택일의 비아냥에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 다 말 못할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그 사정의 정체, 그리고 패거리가 장풍반점까지 들이닥친 절체절명의 밤에 드러나는 본모습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재미라 여기 적지 않습니다.
박정민 이야기도 해야죠. 당시 삼십 대의 배우가 열여덟 고등학생을 연기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은데, 화면에선 정말 열여덟입니다. 껄렁한 말투와 물러서지 않는 허세, 그 아래 숨긴 애정 결핍까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유이로 놀라기 전에, 이 배우의 변신술은 여기서 이미 증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코미디의 그늘, 상필 라인. 서울에 남은 상필은 어리숙한 채로 사채업 사무실에 발을 들이고, 처음엔 불편해하다가 점점 그 일에 적응해가고, 혼자 나선 수금길에 크게 다치고 맙니다. 친구 따라 웃자고 보다가 만만한 어른의 세계에 삼켜지는 청춘의 이야기에 마음이 서늘해지는 구간인데, 정해인의 순한 얼굴이 그 서늘함을 배가시킵니다. 이 영화의 숨은 축입니다.
볼만한가: 웃음과 그늘의 온도 조절
이 영화의 미덕은 온도 조절입니다. 참교육의 화신 거석이형과 무개념 까불이 택일의 코미디로 웃기다가, 문득 카메라를 돌려 이 아이들이 왜 집을 나왔는지, 곁의 어른들은 왜 이 모양인지를 비춥니다. 택일과 엄마의 관계, 어른 흉내를 내다 다치는 상필, 도망치는 게 특기가 된 어른 거석이형까지 — 방황하는 청춘과 그 곁의 어그러진 어른들을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따뜻하게 오갑니다.
아쉬움도 적습니다. 웃음과 드라마의 배합이 후반으로 갈수록 드라마 쪽으로 급히 기울면서 코미디의 탄력이 죽고, 경주 캐릭터와 패거리 서사는 기능적으로 소비되며, 청춘 성장물의 익숙한 경로 — 방황, 사고, 화해 — 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원작 팬에겐 싱크로율의 기쁨이, 원작을 모르는 관객에겐 무난한 기시감이 남는 유형이죠.
점수는 6점. 걸작은 아니지만 캐릭터의 힘으로 두 시간이 성실하게 굴러가고, 마동석의 단발과 박정민의 교복 같은 그림들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금요일 밤에 웃고 싶은데 마음 한구석은 좀 데워지고 싶은 날, 정확히 맞는 영화입니다.
물어볼 것 셋
Q. 시동은 웹툰 원작과 이야기가 같나요?
A. 조금산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고, 큰 줄기와 캐릭터는 원작을 충실히 따르되 두 시간 분량에 맞게 사건이 압축·재배치되었습니다. 캐릭터 싱크로율이 좋다는 평가가 많아 원작 팬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고, 영화를 먼저 본 뒤 웹툰으로 넘어가 디테일을 채우는 순서도 좋습니다.
Q. 거석이형의 정체가 이 글에 나오나요?
A. 적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피해 도망 다니는 이 수상한 주방장의 말 못할 사정이야말로 후반부를 끌고 가는 동력이라, 미리 알면 재미가 크게 줄거든요. 절체절명의 밤에 드러나는 본모습까지, 극장의 몫으로 남겨뒀습니다.
Q. 마동석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봐도 되나요?
A. 기대치를 조정하셔야 합니다. 범죄도시류의 시원한 액션 활극이 아니라 캐릭터 코미디와 청춘 드라마가 몸통인 영화라, 거석이형의 매력도 주먹보다 단발머리와 말맛에서 나옵니다. 15세 이상 관람가로 수위 부담은 없는 편이니, 액션 대신 웃음과 온기를 기대하고 입장하시면 만족스럽습니다.
터미널 전광판 아래서
영화를 다 보고, 열여덟의 그 터미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결국 버스를 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만약 탔더라면 어느 장풍반점 같은 곳에 닿았을까요. 꿀밤을 주는 어른과 3,000원짜리 짜장면과 첫 월급 같은 것들에요.
시동이 남기는 대사는 하나입니다. 말 못할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어른이 되어 보니 알겠더군요. 도망치는 등짝에도 사정은 있다는 것. 그걸 알아보게 되는 게 어쩌면, 인생에 시동을 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