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서 문콕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범퍼의 흠집보다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와이퍼에 끼워져 있던 쪽지였어요. 죄송합니다, 연락 주세요 — 삐뚤빼뚤한 글씨의 그 한 줄이 고마워서 수리비를 반만 받았습니다. 뺑반은 그 쪽지를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들을 쫓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공효진, 류준열, 조정석의 추격극이고, 이 글은 결말을 적지 않은 리뷰이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4.5점입니다.
뺑반 리뷰: 좌천된 에이스와 감식의 귀재
주인공 은시연(공효진)은 원래 경찰 특수본의 에이스였습니다. 재벌 정재철(조정석)과 경찰 수뇌부의 유착 — 돈가방이 오갔고 그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가 존재한다는 — 을 캐다가, 결정적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채 단독 행동이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고 서부서 교통과 뺑소니 전담반, 줄여서 뺑반으로 밀려나죠. 잘나가던 수사관이 하루아침에 뺑소니 신고 현장을 도는 신세가 된 겁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그런데 이 한직에서 시연은 이상한 인재를 만납니다. 순경 서민재(류준열). 어리숙하고 눈치도 없어 보이는 이 청년은 사고 현장의 흔적만으로 도주 차량을 그려내는 감식의 귀재입니다. 파편에 밴 소금기로 수산물 트럭을 특정하고 도색과 부품의 흔적으로 차종을 좁혀가는 솜씨 — 100%라고 해두죠, 라며 얄밉게 확신하는 장면들이 이 영화 수사 파트의 잔재미죠. 그리고 운전대를 잡으면 그 어리숙함이 사라집니다. 민재는 타고난 드라이버입니다. 그 재능의 뿌리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영화가 천천히 꺼내놓는 카드라 여기선 덮어둡니다.
조정석 빌런: 트랙 위의 왕, 웃는 낯의 게임
시연의 과녁은 뺑반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석 달 전 새벽 청라 사거리에서 벌어진 뺑소니 — 현장에 도주 차량의 파편이 남지 않은 이상한 사고 — 의 기록을 들추자, 특수 제작 차량의 그림자와 함께 낯익은 이름이 다시 떠오릅니다. 정재철. F1 트랙을 달리던 드라이버 출신으로 자동차 그룹을 이끄는 이 남자는, 언론 앞에서는 매끈한 미소의 사업가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경찰 수뇌부를 주머니에 넣고 게임하듯 사람을 시험하는 인물입니다. 비슷한 수법의 보험금 지급 내역들, 회사 컨셉트카에 달려 있다는 문제의 블랙박스, 그리고 수사망이 좁혀올 때마다 앞서 움직이는 은폐의 손길 — 수사받던 관계자가 스스로를 해치려 했다는 보도까지 터지는 지경이면, 이 사건의 몸통이 얼마나 깊은 곳에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 영화에서 살아남는 것은 단연 정재철입니다. 조정석은 엑시트의 그 용남과 같은 배우라는 게 믿기지 않는 얼굴로 등장합니다. 웃는 낯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고 분노조차 게임의 한 수처럼 쓰는 서늘한 빌런 — 로맨스와 코미디로 사랑받던 배우의 변신이라는 점에서 이 캐스팅 자체가 이 영화의 가장 과감한 베팅이었고, 그 베팅만큼은 성공했습니다. 속도에 대한 집착과 뒤틀린 승부욕으로 빚어진 이 악역은 한국 상업영화의 빌런 목록에서 꽤 신선한 얼굴입니다.
결국 시연과 민재, 그리고 뺑반 식구들은 각자의 이유로 한 과녁을 향해 뭉칩니다. 트랙 위의 왕을 도로 위에서 잡겠다는, 계급도 장비도 열세인 자들의 추격 — 그 질주가 어디에 닿는지는 극장의 몫으로 남깁니다.
로코의 얼굴로 기억되던 세 배우가 각자 이미지를 벗는 영화 — 그 변신 중 가장 성공한 것이 조정석의 악역이라는 데는 이견이 적습니다.
아쉬운 이유: 깜빡이만 넣다 끝난 교차로
문제는 이 좋은 패들을 쥔 영화가 정작 어느 판에 앉을지 끝까지 정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부패 수사물로 가자니 유착 라인의 서사가 헐겁고, 카체이싱 액션으로 가자니 질주의 분량과 쾌감이 기대만큼 쌓이지 않으며, 뺑반이라는 팀의 앙상블 코미디로 가자니 팀원들에게 돌아간 지분이 너무 얇습니다. 세 장르의 교차로에서 깜빡이만 넣다 끝나는 인상 — 뺑소니를 쫓는 영화가 정작 제 이야기의 진로를 못 잡는 아이러니죠. 시연과 민재의 버디 화학반응도 무르익기 전에 사건이 그들을 끌고 다니고, 후반 전개는 급가속과 급정거를 반복합니다.
배우들은 아깝습니다. 류준열은 돈의 신입 브로커, 봉오동 전투의 독립군과 또 다른 능청과 순정의 배합을 보여주고, 공효진은 가장 보통의 연애의 그 얼굴을 지운 건조한 수사관 연기로 중심을 잡습니다. 개봉 당시 기대치가 컸던 캐스팅에 비해 성적표가 아쉬웠던 이유는 배우가 아니라 진로를 못 정한 각본에 있습니다.
점수는 4.5점. 그래도 이 영화가 남기는 소박한 미덕 하나는 적어둡니다. 뺑소니라는 소재 자체입니다. 거창한 연쇄살인도 국제 음모도 아닌, 도로 위에서 매일 벌어지는 그 비겁한 도주를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현장의 파편 하나, 페인트 조각 하나로 도망친 양심을 끝까지 추적한다는 설정은 장르적 쾌감과 별개로 어딘가 든든합니다.
두 가지 문답
Q. 이 글에 결말 스포가 있나요?
A. 없습니다. 추격의 판이 짜이는 중반까지만 다뤘고, 민재의 과거와 정재철의 악연, 최후의 질주가 어디에 닿는지는 전부 함구했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은 반전과 추격의 몫이 커서, 기대치를 낮추고 아무 정보 없이 보시는 쪽이 그나마 가장 재미있는 관람법입니다.
Q. 세 배우의 다른 작품을 보고 싶다면요?
A.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같은 해에 각자의 대표작을 냈습니다. 조정석은 재난 코미디 엑시트로 942만을 웃겼고, 류준열은 금융 스릴러 돈으로 몸값을 증명했으며, 공효진은 가장 보통의 연애로 로코의 정점을 찍었죠. 세 편 모두 이 블로그에 리뷰가 있으니, 뺑반에서 아쉬웠던 배우들의 제 옷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쪽으로 건너가 보세요.
와이퍼에 남긴 한 줄
영화를 보고 나서 주차장의 그 쪽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연락 주세요 — 뺑반이 필요 없는 세상은 그 한 줄에서 시작될 겁니다. 백미러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와이퍼에 글씨를 남기는 것.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오늘도 어느 사고 현장에서 파편을 줍고 있을 현실의 뺑반들에게는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 리뷰의 교훈은 카체이싱이 아니라 결국 그 쪽지입니다. 도로 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운전은, 멈춰야 할 때 멈추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