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우리 아파트의 새벽, 어디선가 "꺅"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느 집 TV 소리였죠 — 그런데 그 10초짜리 소리에 윗집 불이 켜지고, 옆 동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는 벌써 관리실에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아파트란 그런 곳입니다.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귀가 모여 사는 공간. 이성민 주연의 스릴러 목격자를 둘러싼 혹평의 핵심이 정확히 그 상식에 있습니다. 미리 밝혀두면 이 글의 혹평은 극장에서 이 영화를 즐긴 감상이 아니라 각본의 공정을 향하고, 영화 도입부의 설정 논란을 다루는 글이라 결말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3.5점입니다.
목격자 리뷰: 눈이 마주친 밤
목격자는 제작비 70억 원의 상업 스릴러입니다. 새벽에 귀가해 맥주를 마시던 가장 상훈(이성민)이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진 살인을 창문 너머로 목격하고 — 하필 범인과 눈이 마주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범인은 내가 목격당했음을 알고, 목격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택한다는 설정입니다. 알 만한 배우들이 다수 출연했고 252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죠(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그런데 원본 리뷰어 — 독설로 유명한 걸작선 — 는 이 영화 앞에서 입이 떡 벌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보는 내내 헛웃음이 커지다 마지막엔 산사태처럼 터졌다는 것. 코미디였다면 대성공이겠으나 문제는 이것이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스릴러라는 것 — 만든 쪽은 웃길 의도가 조금도 없는데 관객이 웃게 되는 영화라는 겁니다. 그해를 '망작 레이스'의 해로 부르며 서열 정리에 진심인 이 채널은, 그 레이스의 선두 다툼에 이 영화를 올려놓는 뉘앙스고요.
그리고 이 리뷰의 유명한 선언이 나옵니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데는 영화 이론도, 연기·연출·촬영 이야기도 필요 없다 — 상식만 있으면 된다. 그 상식 두 가지가 다음 섹션의 본론입니다.
개연성 논란 총정리: 고양이는 한국어를 못 한다
상식 하나 — 고양이는 한국어를 못 한다. 영화는 살인범이 차 트렁크에 피해자를 싣고 야산에 들어가며 시작합니다(바로 옆에 아파트가 서 있는 뒷산이라는 입지 선정부터 의문이지만, 여기까지는 영화적 허용으로 넘어가 주자는 것이 리뷰어의 아량입니다). 그런데 깨어난 피해자가 맨발로 도망칩니다 — 담장을 넘고 소리를 지르며 주차장을 지나 아파트 단지의 중앙 지점까지. 범인은 거기까지 쫓아와 범행을 저지르죠. 문제는 그 '거기'입니다. 사방이 사람 사는 집으로 둘러싸인 단지 한중앙, 환하게 켜진 가로등 바로 아래 — 리뷰어의 비유로는 콜로세움 경기장 한가운데만큼 이목이 집중되는 위치.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의 말이 걸작입니다. 밤새 들어온 신고가 딱히 없었다는 것. 고층 아파트 단지의 그 수많은 창문 중 주인공 하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비명조차 들은 사람이 없다는 설정 — 그리고 영화가 내놓는 해명이 화룡점정입니다. 요즘 단지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그렇게 운다더라고. 비명과 고양이 울음을 온 단지가 혼동했다는 이 해명 하나로, 영화는 이론이 아니라 상식과 싸우는 처지가 됩니다.
상식 둘 — 지금은 1988년이 아니라 2018년이다. 피해자는 아파트 외곽에서 화단과 주차장을 지나 단지 중앙까지 달려왔고 범인이 바싹 뒤쫓았습니다. 주인공이 시가 4억이라 밝히는, 조경까지 갖춘 그 아파트에서 두 사람의 동선이 단 한 대의 CCTV에도 잡히지 않습니다. 차량 블랙박스도 전멸, 야간 순찰 경비원도 그 시간엔 없죠. 보통의 시민이 출퇴근길에만 수십 번씩 카메라에 찍히는 시대에 이 단지는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모든 전자 기기가 침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기막힌 것은 피해자의 2시간 — 쓰러졌던 그녀는 약 두 시간 뒤 의식을 차려 핸드폰으로 신고를 시도하는데, 트렁크에 실려 납치됐던 사람이 핸드폰을 그대로 소지하고 있고(리뷰어의 깨알 소품 지적처럼 그 의상에는 큰 핸드폰이 들어갈 주머니도 보이지 않습니다), 피를 흘리며 가로등 아래 두 시간을 누워 있었는데 본 사람도 찍은 카메라도 없으며 — 신고 버튼을 누르는 바로 그 타이밍에, 두 시간 동안 사라졌던 범인이 귀신같이 다시 나타납니다. 리뷰어는 이 총체를 '먼치킨 소설'에 비유하며 탄식하죠. 요즘은 인터넷 소설도 이렇게는 안 쓴다고. 그리고 1부는 "더 말도 안 되는 것이 아직 많다"는 예고로 끝납니다 — 도입부 10여 분 만에 상식 두 개가 무너졌는데 말입니다.
신고 제로, CCTV 제로, 목격자 한 명 — 이 영화의 전제는 영화 이론이 아니라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의 상식과 충돌합니다.
혹평 이유: 상식이 무너지면 공포도 무너진다
이 혹평을 옮기며 보태고 싶은 것은 장르론입니다. 스릴러의 공포는 '저게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감각에서 옵니다. 그래서 스릴러야말로 가장 상식에 충실해야 하는 장르죠 — 관객이 "우리 아파트라면 벌써 신고 전화가 불났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포는 실소로 바뀌고, 영화의 기초 공사가 무너집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영화가 붙잡으려던 소재 자체는 묵직했다는 점입니다. 목격하고도 침묵하는 사람들, 내 가족만 아니면 된다는 방관의 심리 — 우리 사회에 정면으로 던질 가치가 있는 질문이죠. 그 질문을 성립시키려면 '목격했으나 침묵한다'는 전제가 치밀해야 했는데, 영화는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는 허술한 바닥 위에 그 전제를 올려버렸습니다. 좋은 소재가 개연성의 구멍으로 빠져나간 아까운 사례입니다.
균형을 위해 반대편도 적습니다. 252만 관객의 선택은 실재했고, 그 다수는 극장에서 긴장하며 이 영화를 즐겼습니다 — 겁 많고 계산 빠른 보통 가장의 얼굴을 체화한 이성민의 생활 밀착형 연기와 몇몇 추격 시퀀스의 합은 분명 극장값을 하죠. 디테일을 따지지 않고 보는 스릴러로 이 영화를 소비한 감상은 정당하며, 이 글의 혹평은 그 감상이 아니라 각본의 공정을 향합니다. 점수는 3.5점 — 단, 이 점수는 원본 리뷰 1부(도입부 설정 비판)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 후반부를 다룰 2부가 공개되면 보탤 이야기가 더 있을 겁니다.
목격을 마치고 두 가지
Q. 혹평이 많은데, 그래도 볼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A. 설정의 디테일을 따지기보다 배우의 긴장 연기를 즐기는 분들입니다. 목격의 공포와 침묵의 비겁 사이에서 흔들리는 보통 가장 — 이성민의 그 얼굴만으로도 러닝타임이 굴러가고, 쫓고 쫓기는 몇몇 시퀀스는 극장형 몰입을 줍니다. 반대로 이 글의 '상식 시리즈'가 두 시간 내내 눈에 밟힐 유형이라면, 마음 편히 거르셔도 됩니다. 영화가 던지는 방관자 심리라는 질문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 영화보다 그 사회심리학 개념을 찾아 읽는 쪽이 더 묵직할 수 있습니다.
Q. 개연성이 탄탄한 스릴러를 보고 싶다면요?
A. 이 블로그에서 다룬 작품들로 안내하면 — 접견실의 말싸움만으로 긴장을 쌓아 올리는 실화 기반의 암수살인이 정반대 지점의 모범이고, 스타일과 배우의 밀도로 승부하는 독전도 있습니다. 두 편 모두 '그럴싸함'이라는 스릴러의 기초 공사가 단단한 작품들이라, 목격자에서 아쉬웠던 바로 그 지점을 채워줄 겁니다.
창문이 열리는 속도
그 새벽의 비명 소동을 다시 생각합니다. TV 소리 10초에도 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리던 우리의 아파트 — 현실은 영화보다 시끄럽게, 그리고 다정하게 반응합니다. 그 상식이야말로 스릴러가 딛고 서야 할 반석이고, 목격자는 그 반석을 스스로 빼버린 채 지어 올린 집입니다.
상식이 무너진 자리에서 공포는 자라지 않습니다 — 웃음이 자랄 뿐. 그래도 하나는 믿고 싶습니다. 영화 밖 우리의 단지에서는, 오늘 밤에도 비명 한 번에 수십 개의 창문이 열릴 것이라고. 그 창문이 열리는 속도가 곧 우리 사회의 체온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