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케이블카를 타러 간 적이 있습니다. 연인들 자물쇠와 전망대 야경 사이에서 문득, 이 산의 이름이 한 시절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불렸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산의 부장들은 그 시절의 남산, 그러니까 중앙정보부의 부장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말이야 교과서에 있는 역사지만, 영화가 그 결말을 어떻게 채워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 글에 담겨 있으니 그 점은 참고하시고요.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5점입니다.
남산의 부장들 리뷰: 그 산의 다른 이름
영화는 청문회로 문을 엽니다. 1970년대 후반, 미 하원 청문회장에 선 전직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썩은 권력의 맨 끝에 있는 한 사람을 고발하겠다며 회고록까지 준비했다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워싱턴발 뉴스에 청와대가 뒤집히고, 현직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옛 동지였던 그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면서 이야기가 굴러갑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영화의 시계는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 40일 전부터 흐릅니다. 우리는 결말을 이미 압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두 시간이 팽팽한 건, 이 영화가 '무엇이'가 아니라 '왜'를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각하(이성민)의 곁에는 두 남자가 있습니다. 원칙과 명분을 말하는 정보부장 규평, 그리고 충성 경쟁으로 그 자리를 파고드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야당 총재 제명안을 두고 국회에서 병정놀이를 벌였다는 규평의 일침에, 사람에겐 인격이 있고 국가에는 국격이 있다는 훈계에, 상천은 탱크를 들먹이는 것으로 응수하는 인간입니다. 각하는 그 사이에서 저울질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가 반복됩니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이 말이 처음에는 신뢰로, 나중에는 시험으로, 마지막에는 버림의 예고로 들리기 시작할 때 이 영화의 공포가 완성됩니다.
파리에서 옛 동지의 소식이 끊기고 — 영화는 그 과정을 요란하게 전시하는 대신 서늘하게 처리합니다 —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시위대를 두고 밀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까지 오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규평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끊어집니다. 카메라는 그 끊어지는 순간을 클로즈업으로 오래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궁정동의 그 밤. 총성이 울리기 직전까지, 이 영화는 방아쇠가 아니라 사람의 눈을 찍습니다.
실존 인물 정리: 극 중 이름과 역사의 이름
검색해 보시는 분들이 많은 부분이라 정리해 둡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합니다.
김규평(이병헌)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박통(이성민) — 박정희 전 대통령
곽상천(이희준) — 차지철 전 경호실장
박용각(곽도원) — 미국 청문회 증언 후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다만 선은 그어야 합니다. 영화는 실명 대신 극 중 이름을 쓰고, 인물들의 밀실 대화와 내면은 상상으로 채웠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실화의 골격 위에 세운 심리극으로 읽는 게 정확합니다. 특히 파리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 같은 대목은 지금도 역사의 미제로 남아 있는 부분이라, 영화의 묘사를 사실 확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영화도 그 부분을 단정하는 대신 어둠 속에 두는 쪽을 택했고요.
이 영화가 그 시대를 다루는 태도에 대해서도 한마디 적고 싶습니다. 단죄의 영화도, 미화의 영화도 아닙니다. 권력의 방 안 공기를 재현하는 것. 40년 넘게 평가가 갈려온 인물들을 두고 영화가 택한 이 절제가, 오히려 관객 각자의 판단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결말 해석: 영화는 방아쇠가 아니라 눈을 찍는다
이 영화의 영리함은 대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날의 선택이 거사였는지 우발이었는지, 충정이었는지 열등감의 폭발이었는지는 40년 넘게 이어져온 논쟁입니다. 영화는 어느 쪽 깃발도 들지 않습니다. 대신 한 인간의 안쪽에서 그 모든 동기가 뒤엉켜 끓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각하를 향한 충성과 환멸, 2인자의 인정욕구, 밀려난다는 공포, 옛 동지의 최후가 곧 자신의 미래라는 직감. 극 중 규평이 던지는 질문 — 왜 혁명하셨습니까, 우리가 목숨 걸고 혁명한 이유가 겨우 이겁니까 — 는 각하를 향한 물음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입니다.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지 못하게 된 순간이 그를 그 밤으로 데려갔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결말 해석입니다.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대사보다 얼굴 근육으로 연기합니다. 모욕을 삼킬 때 미세하게 떨리는 볼, 임자라는 말을 들을 때 흔들리는 동공. 후반부 한 장면에서는 감정이 무너지는 과정을 컷 없이 얼굴 하나로 통과하는데, 한국 배우의 클로즈업 연기 중 손에 꼽을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민은 실존 인물의 흉내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추상명사를 연기하는 쪽을 택해 성공했고, 이희준은 미련한 충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이아고 역할을 해냅니다.
아쉬움도 적습니다. 심리에 집중한 만큼 속도는 느긋해서 오락형 정치 스릴러를 기대하면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고, 여성 캐릭터의 자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영화가 옳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점수는 7.5점. 총성의 재현이 아니라 총성에 이르는 마음의 지도를 그린 영화이고, 그 지도는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남는 질문들
Q. 남산의 부장들은 어디까지 실화인가요?
A. 청문회 증언, 두 권력자의 충성 경쟁, 부마의 시위, 그리고 10월 26일이라는 큰 골격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합니다. 다만 밀실의 대화와 인물의 내면, 파리 사건의 구체적 전말은 영화적 상상과 해석의 영역입니다. 논픽션 서적 '남산의 부장들'을 원작으로 하되, 심리극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Q. 영화에서 김규평은 왜 그런 선택을 하나요? (스포일러)
A. 영화는 하나의 이유를 지목하지 않습니다. 혁명의 명분이 훼손됐다는 환멸, 라이벌에게 밀려난다는 공포, 옛 동지의 최후에서 본 자신의 미래가 한 사람 안에서 뒤엉키는 과정을 보여줄 뿐입니다. "왜 혁명하셨습니까"라는 그의 물음이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구조가 영화가 제시하는 답에 가장 가깝습니다.
Q. 현대사를 잘 몰라도 볼 수 있나요?
A. 볼 수 있습니다. 인물 관계와 긴장이 화면 안에서 자체적으로 설명되는 심리극이라 사전 지식이 필수는 아닙니다. 다만 10.26 사건의 개요와 이 글의 실존 인물 매핑 정도만 알고 보면 장면마다 겹쳐 보이는 역사의 밀도가 완전히 달라지니, 5분만 검색하고 입장하시길 권합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남산이 다시 보입니다. 케이블카와 야경의 산이기 이전에, 한 시대의 공포가 살았던 주소라는 것. 영화 한 편이 지명 하나의 무게를 되돌려줄 때가 있는데, 남산의 부장들이 그렇습니다.
단죄도 미화도 아닌 자리에서 권력의 방 안 공기를 복원한 이 영화는, 그날의 총성보다 그 총성에 이르는 마음의 지도를 남깁니다. 야경을 보러 그 산에 오르는 날이 오면, 잠깐이라도 그 지도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