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숙박업소에 들어가면 콘센트 구멍을 괜히 한 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불법 촬영이라는 범죄가 우리 일상에 심어둔 불안이죠. 그래서 먼저 분명히 적습니다. 이 범죄는 실재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사회적 죽음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으며,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은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라미란과 이성경의 걸캅스는 바로 그 의제를 정면에 내건 영화였고, 이 글의 비판은 그 의제가 아니라 의제를 담은 그릇 — 영화의 전달 방식과 완성도 — 를 향합니다. 이 영화를 유쾌하게 본 분들의 감상도 정당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고요. 원본 리뷰어는 0점을 매겼지만 제 점수는 배우들의 몫을 반영한 10점 만점에 2점입니다. 결말 언급 있는 리뷰이니 참고하세요.
걸캅스 리뷰: 민원실의 시누이와 올케
박미영(라미란)은 한때 전설로 불리던 강력계 형사였습니다. 표창을 받던 에이스가 지금은 민원실 주무관인 사연 — 고시생 남편의 뒷바라지와 출산·육아를 위해 스스로 민원실을 자원했는데, 남편은 여태 취직을 못 했고 민원실엔 정리해고 바람까지 붑니다. 조지혜(이성경)는 정반대의 이유로 옵니다. 검거 과정의 과잉 진압이 문제가 되어 징계로 민원실 근무를 명받은 것. 그리고 이 둘의 관계가 코미디의 엔진입니다. 미영의 백수 남편이 지혜의 친오빠 — 사이 나쁜 시누이와 올케가 민원실 옆자리에 앉게 된 거죠(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사건은 민원실로 걸어 들어옵니다. 무언가를 신고하려던 한 여성이 놀라 도망치고, 두고 간 휴대폰에서 두 사람은 불법 촬영물과 유포 협박의 정황을 발견합니다. 얼마 뒤 그 피해 여성은 병원에 눕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부모의 호소 앞에 전해지는 검사 결과 — 몸에서 약물 성분이 검출됐다는 것. 그녀는 위험한 약물 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겁니다. 시간은 없는데 조직은 더딥니다. 담당 부서는 산더미 같은 사건과 해외 서버의 벽을 이유로 미온적이고 수사팀은 관할과 절차를 들어 손을 내젓죠.
결국 징계 중인 형사와 민원실 주무관, 자격도 권한도 없는 두 사람이 비공식 수사에 나섭니다. 모텔 몰카 탐문, 콩글리시가 난무하는 이태원 위장 수사, 얼떨결에 하게 된 타투까지 — 좌충우돌 끝에 범인의 꼬리를 잡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지혜의 대사 하나가 이 영화의 마음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 잡으라고 경찰이 있는 건데.
혹평 이유: 0점의 근거 다섯 가지
원본 리뷰어의 0점은 완성도가 아니라 내용을 향합니다. 만듦새만 보면 장르 공식은 지킨 영화 — 다만 코미디인데 웃기지 않고 형사물인데 액션이 헐겁고 버디물인데 케미가 옅다는 진단 — 인데, 0점의 근거는 "성차별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성차별의 방식으로 풀었다"는 판단입니다. 그 논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개봉 13분의 풍경. 악역이 등장하기도 전에 지나간 남성들이 하나같이 한심한 얼굴 — 실수투성이 고시생 남편, 물통 하나 못 꽂는 약골 순경, 조는 팀장 — 뿐이라는 것. 코미디의 과장이라 넘길 수도 있지만, 과장이 한 방향으로만 쌓일 때는 설계가 됩니다. 둘째, 같은 뼈대의 좋은 예와의 비교. 폴 페이그의 스파이는 내근직 여성 요원이 현장에 나서는 흡사한 구조인데도 남성 관객이 반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대립의 축을 남성 대 여성이 아니라 '선입견 대 그것을 깨는 개인'으로 짰기 때문이죠. 세상의 반은 여자라는 말은 뒤집으면 세상의 반은 남자라는 말이고, 자신의 신념을 설득하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은 세상의 반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는 게 리뷰어의 문장입니다. 셋째, 주인공들의 수사 방식. 인가받지 않은 CCTV 열람과 임의의 휴대폰 수색, 불법 체포까지 — 절차를 무시한 정의가 통쾌함의 근거가 되는 순간, 영화는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과 같은 논리 위에 서게 됩니다. 넷째, 현실과의 대조. 영화는 경찰 조직 전체가 이 범죄에 무관심한 것처럼 그리지만, 리뷰어가 경찰 통계연보를 근거로 반박하는 바로는 성범죄 검거율은 90퍼센트 중반대로 전체 평균을 웃돌고 전담팀 신설도 거듭돼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가 피해자 개개인의 좌절을 다 설명하진 못하지만, 비판이 현실을 겨눌 때 과녁은 정확해야 한다는 원칙은 유효합니다. 다섯째, 그리고 제게 가장 아픈 논거 — 피해자의 자리입니다. 이 영화에서 피해 여성들은 도망치는 뒷모습과 병상의 실루엣으로만 존재합니다. 피해자가 통과하는 시간을 응시하는 대신 현실성 옅은 약물 설정으로 공포 분위기만 조성한다는 것. 같은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했던 한공주와 견주면, 피해자를 서사의 장치로 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의제는 옳았으나 화법이 편을 갈랐고, 정작 그 의제의 주인공인 피해자는 화면 밖에 있었다 — 다섯 논거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논란 정리: 콜로세움이 아니라 합의로
균형을 위해 반대편도 적습니다. 이 영화를 옹호하는 목소리 — 오락영화가 이 의제를 정면에 올린 것 자체가 의미라는, 이런 영화가 필요했다는 — 도 실재했고, 개봉 시기 현실의 사건들과 맞물려 많은 관객에게 위로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라미란의 관록과 이성경의 에너지, 몇몇 장면의 합도 분명 웃음을 만듭니다. 그 감상들은 정당합니다. 다만 좋은 의제가 좋은 영화를 자동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으며, 의제가 귀할수록 그릇은 더 정교해야 한다는 것 — 그게 이 리뷰의 결론입니다.
점수 이야기를 정리하면, 원본 리뷰어의 0점은 "해로움"에 대한 항의의 숫자였고, 저는 배우들의 열연과 이 소재를 극장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의 값을 빼지 않아 2점을 적습니다. 이 블로그 최저점 타이인 것은 변하지 않지만요.
마지막으로 리뷰어가 인용한 역사 하나가 오래 남습니다.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끝내 세상을 바꾼 것은 복수의 언어가 아니라 백인도 동의할 수 있었던 평등의 언어, 마틴 루터 킹의 꿈이었다는 것. 평등은 혐오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 어느 방향의 혐오든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석을 남녀로 갈라 세우는 콜로세움이 아니라, 가해자를 정확히 처벌하는 시스템과 서로의 문제를 인정하는 합의 — 이 의제가 가야 할 길은 그쪽일 겁니다.
함께 궁금할 두 가지
Q. 저는 걸캅스를 재밌게 봤는데, 이상한 건가요?
A. 전혀 아닙니다. 라미란과 이성경의 합, 시누이-올케 설정의 코미디, 통쾌한 검거의 카타르시스로 이 영화를 즐긴 관객은 실제로 많았고 그 감상은 온전히 정당합니다. 이 글의 비판은 관객이 아니라 영화의 설계를 향한 것이고, 원본 리뷰어조차 재밌게 본 분들은 기분 상할 필요 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같은 영화를 다르게 보는 것 — 그게 리뷰가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Q. 이 소재를 제대로 다룬 영화를 보고 싶다면요?
A. 리뷰에서도 비교된 한공주(2013)를 권합니다. 피해자가 통과하는 시간을 끝까지 응시하는 영화라 관람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이 의제를 장치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다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웃음기 없는 정공법이 부담스럽다면, 여성 버디물의 모범으로 꼽히는 폴 페이그의 스파이(2015)를 코미디 쪽 대안으로 추천합니다.
불안이 사라지는 순서
글을 닫으며 그 콘센트 구멍을 다시 생각합니다. 낯선 방에서 벽을 살피는 그 몇 초의 불안은 편을 갈라 이긴다고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가해자가 정확히 붙잡히고 합당하게 처벌받는 것을 우리 모두가 반복해서 목격할 때, 그때 비로소 옅어지겠죠.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아쉬움은 결국 기다림의 다른 말입니다. 이 무거운 의제를, 편 가르기의 화법이 아니라 피해자의 자리에서 정교하게 담아낼 다음 영화를 기다립니다. 그 영화가 나오면 — 점수 때문에 싸울 일 없이,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