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만약에' 놀이를 좋아했습니다. 만약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 기관총이 있었다면, 만약에 내가 그때 그 학원을 안 갔다면. 영화판에서는 이 놀이를 What if, 가상 역사물이라 부르죠. 강철비2 정상회담은 국가 단위의 만약에 놀이입니다. 만약에 남·북·미 평화협정 서명 직전에 쿠데타가 터지고 세 정상이 통째로 핵잠수함에 갇힌다면. 정우성, 곽도원, 유연석이 그 만약에를 연기하는 영화이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5.5점입니다. 결말은 이 글에 적지 않았으니 관람 전이어도 편하게 읽으셔도 됩니다.
강철비2 정상회담 리뷰: 국가 단위의 만약에 놀이
이 영화의 규칙부터. 시대 배경과 국제 정세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그대로 가져오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만 가상의 시나리오로 써 내려갑니다. 마블이 캡틴 아메리카가 좀비였다면 따위를 상상하는 What if 시리즈와 같은 원리죠(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이야기는 이렇게 굴러갑니다. 한반도 평화협정을 위해 남·북·미 정상이 원산에 모이지만 회담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그 와중에 강경파 호위총국장 박진우(곽도원)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 정상을 북한의 최신 핵잠수함에 감금해버립니다. 좁은 함장실에 갇힌 세 남자 — 침착하게 중재하려는 한국 대통령(정우성), 자존심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젊은 북 위원장(유연석), 그리고 시종 소란스러운 미국 대통령 스무트 — 의 밀실극과, 잠수함 바깥의 수중전이 영화의 몸통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재밌게 본 건 의외로 전반부입니다. 관객 다수가 지루했다, 역사 강의 듣는 줄 알았다고 평한 바로 그 구간이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묘사가 지독하게 현실적이라 오히려 흥미로웠습니다. 통일이든 화해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처지, 합동훈련을 하자니 한쪽이 반발하고 안 하자니 다른 쪽이 압박하는 사면초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대통령이 회의하고 설득하고 또 고민하는 장면들. 보다 보면 답답해서 짜증이 나는데, 그 짜증이야말로 이 영화가 노린 리얼리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의 지도 위에 가상의 사건을 얹는 만약에 놀이 — 전반부의 답답한 리얼리티까지는 이 놀이가 꽤 잘 굴러갑니다. 문제는 잠수함 문이 닫히면서부터입니다.
1편과 차이: 이어지지 않는 속편, 자리를 바꾼 배우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것부터. 이 영화, 강철비 1편과 이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감독에 비슷한 배우진, 비슷한 제목이지만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이라 전작을 안 봤어도 무방합니다. 재미있는 건 배우들의 자리바꿈인데, 1편에서 북의 군인이었던 정우성이 이번엔 한국 대통령이 되고, 1편의 남측 인물이던 곽도원이 북의 강경파가 됩니다. 관람 전엔 헷갈릴까 걱정했는데 막상 보니 적응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재밌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1편입니다. 2편도 나름 볼만하지만 1편에 비해 아쉬운 후속작이라는 게 솔직한 감상입니다. 후반부 잠수함 파트가 반반이거든요. 수중전 자체는 어뢰전의 전략도 다양하고 볼만합니다. 다만 액션이 너무 늦게 시작되고, 하필 그 바다가 독도 인근이라는 설정은 작위가 짙습니다. 진짜 아쉬운 건 함내 밀실극입니다. 세 정상의 케미로 끌고 가야 할 구간을 방귀와 배탈 같은 1차원 화장실 개그로 채우는데, 개그가 나올 때마다 쌓아둔 긴장이 통째로 무너집니다. 무거운 소재를 풀어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차라리 정치 풍자 개그였다면 어땠을까요. 1편이 손익분기점을 아슬하게 넘긴 학습효과로 이번에 대중성을 노린 게 아닐까 하는 사견에는 저도 한 표를 보탭니다. 결과적으로는 안 넣느니만 못했다는 쪽으로요.
정치색 논란: 모티브와 덧칠 사이
이 영화의 진짜 논쟁 지점입니다. 세 정상은 모두 현실의 정치인들을 모티브로 가져왔습니다. 쇼 비즈니스를 사랑하는 미국 대통령, 젊은 북의 지도자, 중재자 역할의 한국 대통령. 문제는 그 모티브 위에 감독의 이상과 상상을 덧칠하면서 캐릭터들이 현실감을 잃는다는 겁니다. 스무트 대통령은 거의 광대 수준으로 희화화됩니다. 각국 정상 앞에서 밥 달라고 조르고 소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다 보면, 특정 인물에 대한 호오를 떠나 한 나라의 정상을 이렇게까지 그리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어집니다. 반대로 북 위원장은 인민을 위해 고뇌하는 애국자로, 한 대통령은 흠결 없이 옳은 일만 하는 성인군자로 그려지는데, 이런 사람이 실제 후보로 나오면 뽑고 싶겠다 싶을 만큼 멋있긴 한데 너무 바른말만 하니 캐릭터로서는 심심합니다. 결국 세 인물 모두에게서 현실 정치의 얼굴 대신 감독이 바라는 세상만 보인다는 것, 그게 이 논란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정치색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있습니다. 어느 방향인지도 분명합니다. 관객의 성향에 따라 시원하게 볼 분과 불편하게 볼 분이 갈릴 영화라는 걸 미리 알고 입장하시는 게 좋습니다. 다만 보는 요령도 있습니다. 이건 다큐가 아니라 가상 역사물이니, 감독의 만약에를 하나의 의견으로 들어보자는 마음이면 크게 불쾌할 것 없이 볼 수 있습니다. 단, 엔딩 크레딧의 쿠키 영상은 각오하세요. 메시지를 대놓고 가르치듯 던지는데, 맞는 말도 잔소리로 들리면 반감부터 드는 법이죠. 부모님이 공부 좀 해라 하면 하려던 공부도 하기 싫어지는 그 원리입니다.
점수는 5.5점. 1편이 더 좋았고 개그는 실패했지만, 국제 정세와 외교의 체스판에 관심 있는 분과 잠수함 액션 팬에게는 볼 이유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원본 리뷰어의 당부 하나를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별점을 매기더라도 꼭 보고 나서 매길 것. 영화는 보기 전에 까는 게 아니라, 보고 까는 겁니다.
두 가지 문답
Q. 강철비 1편을 안 보고 2편을 봐도 되나요?
A. 됩니다. 제목과 감독, 배우진만 이어질 뿐 세계관과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입니다. 오히려 1편의 배역을 기억하는 분이 배우들의 자리바꿈에 잠깐 낯설 수 있는 정도죠. 다만 두 편을 비교하는 재미가 상당하니, 여유가 되면 1편부터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Q. 강철비2, 어떤 사람에게 맞는 영화인가요?
A. 국제 정세와 외교전의 수 싸움을 좋아하는 분, 잠수함 어뢰전을 좋아하는 분에게 맞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와 정세를 어느 정도 알고 보면 이해가 빨라지니 가벼운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더 좋고요. 반대로 정치적 메시지에 예민한 분이라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선택하시길 권합니다.
만약에를 접으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만약에 놀이는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만약에 저 좁은 함장실의 대화가 조금 더 진지했다면, 만약에 개그의 자리에 풍자가 있었다면. 이 영화는 좋은 만약에서 출발해 아쉬운 만약에들을 남긴 작품입니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처지의 답답함, 그 리얼리티만큼은 이 영화가 제대로 담아냈다는 것. 그 답답함을 두 시간 동안 체험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만약에 놀이에 표 한 장 값은 걸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