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 이 두 글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벽 한 시, 헤어진 사람에게서 도착한 — 혹은 보낼까 말까 백 번을 쓰다 지운 — 그 짧은 안부의 정체가 안부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죠. 가장 보통의 연애는 그 두 글자를 결정적인 순간에 배치할 줄 아는 영화입니다. 김래원과 공효진의 청불 로코라는 간판 때문에 야한 코미디를 기대하면 결이 다릅니다. 이것은 상처의 영화예요. 결말까지 담은 리뷰이니 스포일러에 유의하시고,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7점입니다.
가장 보통의 연애 리뷰: 두 피해자의 어긋난 시작
광고회사 팀장 재훈(김래원)의 사정부터. 그는 파혼했습니다. 그냥 파혼이 아니라 청첩장까지 돌린 뒤 신혼집에서 약혼녀의 배신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파혼했죠. 회사에는 내막을 숨긴 채 그냥 헤어졌다고만 해뒀고, 그래서 뒤에서는 그가 차인 건지 찬 건지를 두고 안주 삼는 말들이 돕니다. 본인은 매일 만취. 밤마다 전 약혼녀에게 취중 전화를 걸고, 필름이 끊긴 채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안에 술집 입간판이며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비둘기까지 들어와 있는 지경입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그 회사에 선영(공효진)이 경력직으로 출근합니다. 그런데 첫 출근 회식 자리에 전 남자친구가 난입해 프로포즈 소동을 벌이죠. 전남친이 먼저 바람을 폈고 선영이 맞바람으로 응수하고 헤어졌는데, 이 남자가 미련을 못 버리고 남의 회사 회식까지 쳐들어온 겁니다. 그렇게 재훈과 선영은 동갑내기 사수와 부사수로, 서로에 대한 어설픈 소문 몇 조각만 쥔 채 만납니다. 서먹하던 둘을 이어붙이는 건 눈치 없는 게 미덕인 동료 병철(강기영)의 술자리이고, 둘만 남은 포장마차 2차에서 이 영화의 명장면이 나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문장을 맞히는 게임 — 선영이 던지는 문장들의 수위가 차마 글로 옮기기 민망한 종류라, 재훈의 얼굴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극장도 무너집니다. 이 대목의 대사 상당수가 공효진의 애드립이었다는 후일담까지.
이후 회사 등산 단합대회의 뒤풀이에서 이번엔 선영이 진짜로 만취해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서로 기억이 안 나는 척 지나갑니다. 될 듯 말 듯한 3센티미터의 거리. 그 거리를 좁히려 선영이 용기 내 전화를 건 날, 하필 재훈의 집에 찾아와 있던 전 약혼녀가 그 전화를 받고 통화 기록을 지워버립니다. 어긋남의 완성이죠.
공효진 애드립: 겪어본 사람의 문장들
그리고 이 영화의 진짜 악역이 등장합니다. 소문. 선영이 전 직장에서 유부남 상사를 꼬셔 편하게 회사 생활을 하려다 잘렸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험담이 오가던 단체 채팅방에 하필 선영이 초대되어 있었다는 대참사까지 겹칩니다. 진실은 정반대 — 들이댄 쪽은 유부남 상사였고 선영은 밥 한 번 먹어준 게 전부였으며, 아내에게 들킨 상사가 제 살길로 선영을 팔아넘긴 것 — 이지만, 선영은 해명 대신 퇴사를 택합니다. 그 정도로 당한 사람은 변명조차 하기 싫어지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송별회 장면이 터집니다. 자기 없는 송별회를 핑계로 모여 험담을 안주 삼던 직원들 앞에 당사자가 걸어 들어와, 앞에서는 위해주는 척 뒤에서는 할 말 다 하던 이들의 뒷말을 하나하나 돌려주는 장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라는 걸 압니다. 그런데 판타지라서 좋았습니다. 욕하는 쪽에 속하기는 얼마나 쉽고 그걸 견디는 쪽이 되는 건 얼마나 아픈 일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그 불가능한 대리 청산의 2분이 이 영화의 카타르시스입니다. 그리고 3개월 후. 선영은 TV에서 자신이 아이디어를 냈던 콩 광고가 자신이 말한 그림대로 완성된 걸 보고, 그날 밤 먼저 카톡을 보냅니다. 자니. 그 두 글자에 재훈은 한달음에 달려 나오고, 두 사람은 처음 게임을 했던 그 포장마차에 다시 마주 앉습니다. 마지막 입모양 게임 — 선영이 소리 없이 말합니다. 보고 싶었어. 재훈이 이번엔 음성으로 답하죠. 나도 보고 싶었어. 그렇게 가장 보통의 연애가 시작되며 영화는 닫힙니다.
이 영화는 공효진이 아니었으면 성립하지 않았을 겁니다. 얼마나 쉬었다 만나야 바람이 아닌 거냐고 되받아치는 대사도, 전화기에 대고 툭 던지는 엉뚱한 조언 — 엄지로 잘 닦으라던 — 도 애드립이었다는데, 그 문장들에는 겪어본 사람의 울컥함이 배어 있습니다. 공블리라는 애칭이 거저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다시 증명하는 연기죠. 김래원의 재발견도 반갑습니다. 강렬한 장르물의 얼굴로 소비되던 배우의 살짝 무너진 현실적인 얼굴이 로코와 이렇게 잘 붙는지 몰랐고, 병철 역 강기영은 웃음의 완급을 조율하는 숨은 공신입니다. 같은 포장마차에서 각자 전 연인 문제로 우는 두 남녀의 웃픈 장면 같은 것도, 이 배우들이라 삽니다.
포차의 입모양 게임으로 시작해 같은 포차의 입모양 고백으로 닫히는 수미상관 — 이 영화의 낭만은 그 대칭에 있습니다.
볼만한가: 보통의 연애까지 가는 과정
이 영화의 제목을 정확히 푸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의 연애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보통의 연애까지 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라는 것. 두 사람은 각자의 배신에서 아직 걸어 나오지 못한 피해자들이었습니다. 재훈에게 필요했던 건 같이 슬퍼해줄 사람, 선영에게 필요했던 건 같이 분노해줄 사람이었는데 주변의 모두는 그들의 상처를 위로가 아니라 뒷담화의 재료로만 소비했죠. 나를 이해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 그 당연하고 어려운 상태에 도달하는 이야기라서 제목이 가장 보통의 연애입니다.
뼈아픈 지점도 있습니다. 2005년의 연애의 목적과 이 영화를 나란히 놓으면,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회사라는 조직에서 소문이 도는 방식, 그 표적이 되는 쪽과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쪽이 갈리는 방식이 놀랄 만큼 그대로라는 것. 사람 수만큼 단톡방이 있다는 농담 같은 진실까지,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직장인이라면 뜨끔할 디테일들로 지어져 있습니다. 연출도 영리합니다. 카톡을 서사의 엔진으로 쓰는 감각, 등장인물 소개를 카톡 대화 형식으로 처리한 엔딩 크레딧의 센스, 그리고 큰돈 들이지 않고도 장르물을 반듯하게 만들 수 있다는 증명 — 손익분기 260만을 넘겨 300만대로 마무리된 알짜 흥행이 그 증거입니다.
물론 모두의 영화는 아닙니다. 밀도가 낮은 킬링타임이라는 아쉬움도, 인물들이 모든 상황을 술로 통과하는 데 지친다는 불편도 있습니다. 드라마 또 오해영 때도 갈렸던 그 논쟁이죠. 반대편의 항변도 일리가 있습니다. 청첩장 돌리고 파혼한 사람이 맨정신으로 잠들 수 있겠느냐고. 저는 후자에 가깝지만, 술잔의 반복이 피로한 관객이 있으리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점수는 7점. 러블리한 공효진과 솔직한 현실 로맨스가 필요한 밤, 두 시간을 맡기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묻고 답할 셋
Q. 청소년 관람불가인 이유가 뭔가요? 많이 야한가요?
A. 노출 수위 때문이라기보다 대사와 소재의 수위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연애 대화가 여과 없이 오가고 음주 장면이 많아 청불 등급을 받았지만, 자극적인 장면 자체는 적은 편이에요. 오히려 성인이라면 민망함보다 공감으로 웃게 되는 종류의 수위라, 연인끼리 보기에도 무난합니다.
Q. 공효진 애드립은 어떤 장면들인가요?
A. 대표적으로 포장마차 입모양 게임의 그 문장들, 얼마나 쉬었다 만나야 바람이 아니냐고 되받아치는 설전,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던지는 엉뚱한 생활 조언까지가 애드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독의 설계 위에 배우의 실감이 얹히면서 캐릭터가 살아났다는 평가라, 이 영화의 명대사 지분 상당량이 배우의 몫입니다.
Q. 이 영화가 좋았다면 이어서 볼 작품은요?
A. 직장과 연애의 씁쓸한 리얼리티 쪽이 좋았다면 연애의 목적을, 상처받은 어른들이 술과 함께 서로에게 스며드는 결이 좋았다면 드라마 또 오해영을 권합니다. 셋을 이어 보면 15년에 걸친 한국 직장인 연애 잔혹사가 한 줄로 꿰어지는 재미가 있습니다.
새벽 두 글자에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새벽의 그 두 글자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자니 — 그것은 미련의 문장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두 피해자가 마침내 보통의 자리로 걸어 나오는 출발 신호였으니까요.
당신의 휴대폰에도 보내지 못한 자니가 한 통쯤 저장되어 있다면, 그것이 미련인지 출발인지는 이 영화를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보통의 연애는 대단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내 편에서 같이 울고 같이 화내줄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 그 보통이 얼마나 귀한지를, 이 유쾌한 영화는 끝내 뭉클하게 가르쳐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