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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리뷰 (고문치사, 박종철, 6월항쟁)

Stv 2026. 10. 15. 10:28

목차


    생애 첫 투표를 하러 간 날을 기억합니다. 기표소 커튼을 닫고 도장을 꾹 눌러 찍던 몇 초 — 솔직히 그날의 저는 그 종이 한 장이 조금 귀찮기까지 했습니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인 줄 알았으니까요. 영화 1987은 그 당연함의 영수증입니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강동원 — 쟁쟁한 배우들이 기꺼이 조각이 되어준 723만의 실화. 실존하는 분들의 이야기인 만큼 이 글은 담담하게 쓰려 합니다. 강동원 배우가 맡은 인물의 정체는 큰 스포일러라 본문에서는 접어두고 문답에서만 다루며,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8점입니다.



    1987 영화 리뷰: 서류 한 장으로 덮으려던 죽음

    1987년 1월 14일, 남영동의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의 대학생 박종철이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둘러싼 자들의 첫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하고 오늘 밤 안으로 화장하자는 것. 서류 한 장으로 한 청년의 존재를 지우려던 계획은 그러나 뜻밖의 벽에 부딪힙니다. 당직이던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 — 짜장면에 소주 한잔 걸치려던 이 심드렁한 남자가 서류를 보고 묻죠. 죽은 지 여덟 시간도 안 됐는데, 아버지가 아들 시신도 확인 안 하고 화장을 하라고 했다? 빗발치는 외압 전화에도 그는 버팁니다. 부검하고 사인이 나와야 할 거 아니야 — 법이 그래, 법이(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그 맞은편에 이 영화의 괴물, 대공수사처의 박 처장(김윤석)이 있습니다. 빨갱이를 잡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애국이 되는 세계에 사는 남자. 권력의 이름들을 들먹이는 그의 위압에도 최 검사는 기어이 부검 명령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한편 기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보도지침이 언론의 입을 틀어막던 시대 — 그러나 "경찰 조사받던 서울대생 사망"이라는 한 줄이 흘러나오자 기자실의 모든 전화가 울리죠. 윤상삼 기자는 그날 남영동에 불려갔던 중앙대 용산병원의 오연상 의사를 집요하게 찾아가고, 위협 속에 말을 아끼던 의사는 화장실의 물소리 곁에서 조용히 결정적 증언을 남깁니다. 조사실엔 욕조가 있었다고, 물소리를 들었다고.

    그리고 경찰의 공식 발표가 나옵니다.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겁에 질린 학생이 억 하고 쓰러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 —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뻔뻔한 문장으로 남은 그 발표입니다.


    실화 총정리: 부검대 위의 진실, 담장 안의 기록

    진실은 부검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외압과 회유의 봉투를 물리친 황 박사의 부검 소견 —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물이 있던 조사실, 욕조, 그리고 그 소견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진실. 동아일보 1면에 박힌 활자들 앞에서 서류 한 장으로 덮으려던 죽음은 온 국민의 물음표가 됩니다. 궁지에 몰린 박 처장의 해법은 꼬리 자르기였습니다. 그날 조사실에 있던 부하 둘만 과실치사로 둔갑시켜 구속하는 것 — 조직을 위해 잠깐만 들어가 있으라고, 가족은 책임지겠다고.

    그렇게 수감된 조 반장이 영등포 교도소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두 번째 릴레이가 이어집니다.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 수감 중인 해직기자 이부영에게 바깥소식을 넣어주던 그는, 조 반장 쪽에서 새어 나온 진실의 조각들을 이부영의 옥중 기록으로 받아 바깥의 민주화 인사 김정남에게 전하는 비둘기가 됩니다. 은폐의 설계자가 가족까지 틀어쥐며 입을 막는 사이, 진실은 교도소 담장 안에서 잉크로 적히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1987년 4월 13일, 지금의 헌법 그대로 후임자에게 정권을 넘기겠다는 대통령의 호헌 선언이 모든 희망에 찬물을 끼얹고 — 수사망에 전달 루트마저 끊기자 남은 연락책은 단 한 사람, 한병용의 조카이자 대학 신입생인 연희(김태리)뿐입니다.

    이 영화의 영리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연희는 투사가 아닙니다. 삼촌의 부탁을 그녀는 거절하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그날 같은 건 안 와요. 이것은 비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대부분의 마음이었을 것이고, 영화는 그 보통의 마음이 어떻게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지를 천천히 따라갑니다. 그 길목에 한 선배가 있습니다. 첫 미팅 날 시위에 휘말려 쫓기던 연희를 구해준 최루탄 연기 속의 청년 — 신발이 벗겨진 채 그녀를 지켜줬고, 훗날 같은 운동화를 수줍게 건네는 남자. 연희는 삼촌의 편지를 전할 수 있을까, 덮인 진실은 끝내 밝혀질까 — 그 뒷이야기는 영화와 역사의 몫으로 남깁니다.

    검사, 의사, 기자, 수감자, 교도관, 그리고 평범한 대학생 — 이 영화에 단독 주인공은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바통을 쥔 사람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받아 뛰는, 릴레이의 각본입니다.

    강동원 역할의 의미: 운동화가 바통이 되는 순간

    대본의 리뷰어가 이 영화의 주제를 요약한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 목이 잘릴 각오로 버틴 검사, 협박 속에서 사실을 말한 의사, 펜을 꺾지 않은 기자들, 담장 안에서 기록한 수감자, 그것을 나른 교도관,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딘 평범한 대학생까지 — 특별한 영웅 한 명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한 보통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였다는 이 구조야말로, 1987이라는 영화가 그해에 바치는 가장 정확한 헌사입니다.

    그리고 운동화. 연희를 구하다 한쪽 신발이 벗겨진 청년, 끌려가던 날 한쪽 신발을 잃은 연희, 그녀에게 건네지는 같은 운동화 — 이 영화에서 운동화는 소품이 아니라 바통입니다. 누군가 벗겨진 자리에서 다음 사람이 신고 달리는 것. 강동원이 연기한 이 인물의 정체를 알고 나면 그 운동화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지는데, 그 이야기는 아래 문답에서 조심스럽게 다루겠습니다.

    배우들은 이 릴레이를 완벽하게 받아냅니다. 신념이라 믿는 광기를 연기한 김윤석, 심드렁함 속의 강단 하정우, 소시민의 떨리는 용기 유해진, 시대의 보통 마음을 짊어진 김태리. 영화적 흠을 굳이 적자면 후반부 감정의 포화가 다소 숨 가쁘다는 정도인데, 이 소재 앞에서 그것은 흠이라기보다 체온일 겁니다. 점수는 10점 만점에 8점 — 그리고 이 점수와 별개로, 그해의 이름들과 희생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당연한 것들의 값이라는 사실을 함께 적어둡니다.


    조심스럽게 묻고 답할 둘

    Q. 강동원이 맡은 인물은 누구인가요? (강한 스포일러)

    A. 모르고 보시는 게 가장 좋지만, 검색해 오신 분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적습니다. 그는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입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시작된 그해의 이야기는, 6월의 시위 현장에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한 이 청년에게로 이어지며 온 국민을 거리로 불러냈습니다. 영화 속 운동화가 그토록 각별한 이유 — 그가 쓰러지던 날 벗겨진 실제 운동화 한 짝은 복원되어 지금도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두 분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


    Q. 어디까지가 실화인가요?

    A. 뼈대가 거의 실화입니다. 박종철 열사 사건과 당일 화장 시도, 부검을 지켜낸 검사, 결정적 증언을 남긴 오연상 의사, 진실을 보도한 기자들, 꼬리 자르기 구속, 교도소의 옥중 서신과 그것을 나른 교도관, 그리고 사제단의 폭로까지 — 모두 기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김태리가 연기한 연희는 그 시대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하도록 창작된 시선의 캐릭터고요. 관람 후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의 실제 기록을 찾아 읽어보시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다시 보입니다.


    기표소 앞에서

    그 첫 투표의 날로 돌아간다면, 기표소의 커튼을 닫으며 조금은 다른 마음이 될 것 같습니다. 귀찮음이 아니라 고마움으로 — 도장 한 번이 당연해지기까지 서른 몇 해 전 겨울과 봄과 유월을 건너온 사람들을 한 번쯤 떠올리면서요.

    이 영화는 그 떠올림의 가장 좋은 교과서입니다. 그날을 건너온 모든 분들께, 그리고 끝내 그날을 보지 못한 두 청년에게 — 이 글의 마지막 줄을 빌려 감사와 추모를 전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xgNQ8cjtfk